해설:
이 시편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질문하는 점에서 시편 37편과 닮았습니다. 이 시편은 아삽이 지은 시로 되어 있는데, 아삽은 다윗이 레위 가문에서 뽑아 세운 예배 음악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불의한 현실에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1-16절). 그는 하나님을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1절)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과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고 말합니다(2절). 현실에서는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사람들이 아니라 거만한 자들과 악인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3절).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불행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5절) 죽을 때에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 같습니다(4절). 그들은 오만 방자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6절). 교만에 가득 차서 안하무인격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7-9절).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마저도”(10절) 그들의 악행을 따르고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느냐?”(11절)고 말하면서 죄악을 행합니다. 그들의 마음과 입과 몸이 속속들이 악으로 물들어 있는데도 신세는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갑니다(12절).
이런 상황에서 아삽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란 말인가?”(13절)라는 질문으로 그는 온종일 괴로움을 당했고 아침마다 번민했습니다(14절). 때로 그는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15절)라는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만일 그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하나님을 등지고 형제자매들을 배신했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풀리지 않았습니다(16절).
그 얽힌 문제가 풀린 것은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현실에 눈 감고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가 보였습니다.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17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바로잡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18-19절). 하나님께서 손을 드시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악인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알았습니다(20절).
이런 깨달음 가운데서 아삽은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눈 앞의 현실에만 붙들려서 불평하고 의심하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21-22절).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에 대해 고백합니다(23-24절). 그 사랑을 믿기에 그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위해 죄악에 손을 담그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다짐합니다(25-27절). 이렇게 기도한 다음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28절)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악인들의 번영을 보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불평 했지만 실은 그들의 번영을 시샘하고 그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3절).
묵상:
이 시편이 쓰인 것은 3천 년도 지난 과거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을 읽다 보면 마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한 묘사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의 본성은 변함 없고 인간의 죄성이 변하지 않으니 인간 사회의 부조리도 역시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부조리를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거나, 살아 있다 해도 이 세상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변덕스럽고 부조리한 신들과 같다고 해야 더 옳아 보입니다.
아삽의 회의는 정당합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지평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그 질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현실에 눈 감고 하나님 나라에 눈 뜰 때 비로소 실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현실의 부조리는 하나님 부재의 증거도 아니고 하나님의 불의의 증거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그 모든 질문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불평한 것은 정작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원망 했던 것은 그분의 부조리함 때문이 아니라 악인들 처럼 누리지 못하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얼마나 가지고 누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에 진정한 복이 있음을 인정하고 평안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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