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3편: 진정한 복

해설:

이 시편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질문하는 점에서 시편 37편과 닮았습니다. 이 시편은 아삽이 지은 시로 되어 있는데, 아삽은 다윗이 레위 가문에서 뽑아 세운 예배 음악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불의한 현실에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1-16절). 그는 하나님을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1절)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과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고 말합니다(2절). 현실에서는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사람들이 아니라 거만한 자들과 악인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3절).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불행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5절) 죽을 때에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 같습니다(4절). 그들은 오만 방자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6절). 교만에 가득 차서 안하무인격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7-9절).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마저도”(10절) 그들의 악행을 따르고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느냐?”(11절)고 말하면서 죄악을 행합니다. 그들의 마음과 입과 몸이 속속들이 악으로 물들어 있는데도 신세는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갑니다(12절). 

이런 상황에서 아삽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란 말인가?”(13절)라는 질문으로 그는 온종일 괴로움을 당했고 아침마다 번민했습니다(14절). 때로 그는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15절)라는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만일 그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하나님을 등지고 형제자매들을 배신했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풀리지 않았습니다(16절).

그 얽힌 문제가 풀린 것은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현실에 눈 감고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가 보였습니다.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17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바로잡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18-19절). 하나님께서 손을 드시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악인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임을 알았습니다(20절). 

이런 깨달음 가운데서 아삽은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눈 앞의 현실에만 붙들려서 불평하고 의심하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21-22절).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에 대해 고백합니다(23-24절). 그 사랑을 믿기에 그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위해 죄악에 손을 담그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다짐합니다(25-27절). 이렇게 기도한 다음 아삽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28절)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악인들의 번영을 보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불평 했지만 실은 그들의 번영을 시샘하고 그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3절).

묵상:

이 시편이 쓰인 것은 3천 년도 지난 과거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을 읽다 보면 마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한 묘사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의 본성은 변함 없고 인간의 죄성이 변하지 않으니 인간 사회의 부조리도 역시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부조리를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거나, 살아 있다 해도 이 세상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변덕스럽고 부조리한 신들과 같다고 해야 더 옳아 보입니다. 

아삽의 회의는 정당합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지평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그 질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현실에 눈 감고 하나님 나라에 눈 뜰 때 비로소 실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현실의 부조리는 하나님 부재의 증거도 아니고 하나님의 불의의 증거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그 모든 질문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불평한 것은 정작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원망 했던 것은 그분의 부조리함 때문이 아니라 악인들 처럼 누리지 못하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얼마나 가지고 누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에 진정한 복이 있음을 인정하고 평안을 얻습니다. 

6 responses to “시편 73편: 진정한 복”

  1. 세상의 부조리와 세속적인 쾌락에 한눈을 팔고 살아왔던 비천한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님의 지성소에 들어갈수 있음을 뒤 늦게 깨달았습니다. 공의로우시고 사랑이신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하시는 긍휼의 주님을 피부로느끼며 주님을 알고 믿는 그 축복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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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때와 장소에 억매이지 않은 인간의 참 상을 아삽을 통해 다시한번 깨달게 되며 내 자신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를 반성합니다.
    주님의 성전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지켜주시고 늘 주님의 그늘 안에 머물게 해 주십시요.
    새해에도 악인의 유혹에 곁눈질 하는 일이 없이 오직 주님의 길을 따라가며 깨어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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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새해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축하의 메세지를 많이 받습니다.’복’이라는 의미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내 평생 지향 하는 복, 그것이 오늘 시편기자의 정의 인 복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 2023년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는 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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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제는 오전에 한국에서 안 좋은 소식이 와서 종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남편과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2월에 코로나 확진이 되어 집에서 통원하며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약 10일 정도 지나고 괜찮아져서 외출을 준비하다 쓰러진 뒤에 의식이 있다 없다를 반복하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답니다. 코로나는 음성 반응이 나오는걸로 보아 치료가 된 듯 하지만 폐렴으로 진행이 되었고 뇌하수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담당 의사가 말했습니다. 연말에 상황이 급하게 악화되어 병원측에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친구들은 종합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전원 (병원을 옮김)을 시도했지만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소식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보내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부모님이 가시는 것은 인생 싸이클로 여겨지고, 때가 되면 다 겪는 일로 생각되지만 친구를 보내는 일은 아주 가까운 일, 바로 내 앞에 떨어진 일처럼 느껴집니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라는 생각만 듭니다. 한국에서 살 때는 물론이요 미국에 온 뒤에도 서로 왕래하며 지내던 가정이기에 더더욱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뿐입니다. 베데딕토 16세 전 교황의 서거도, 나의 20대 선망의 대상이던 바바라 월터스의 영원한 굿바이도 다 ‘남의 일’이었는데, 친구와 헤어지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얻어 맞은 것 같다”는 남편의 말처럼 마음 뿐 아니라 몸도 같이 상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시편의 기자는 마음에 일던 풍랑이 잠잠해진 것을 노래합니다. 악한 인간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꼈기에 (3절) 마음에 번민이 많았는데 성전으로 나아가서야 (17절) 그들이 모두 죽어 없어질 것 (19절)을 알게 되어 그동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한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일어났습니다. 몸과 마음이 점점 약해지는 중에도 (26절)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면 평강과 감사가 찾아온다고 노래합니다. 오늘도 성령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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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보이지 않은 것을 볼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질수 있도록, 오늘도 눈을 감고 기도해 봅니다. 분명 우리가 주목하는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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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많은 부를 누리고 사는 자와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살때 부자는 떵떵거리고 거들먹거리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를 지키기 위해 밤잠을 설칠것이고 더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의 재산을 어떻게하면 빼앗을까를 고민합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는 항상 나는 왜 이렇게 가난과 싸워야 하는가라고 한탄하는 마음과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남의 재산을 훔치거나 강탈하려는 마음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부류의 인간이 아삽 처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면 이런 악한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17절). 주님 아삽의 깨달음이 저의 깨달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오늘 하루를 자족하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살면서 그 하나님을 전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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