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도 아삽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다스헷’은 음악용어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시편은 74편에서 토로한 절망적인 호소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은혜를 입은 자가 기도할 때 첫 번째로 할 말은 감사와 찬송입니다(1절). 새번역에는 그 의미가 숨어 버렸지만 시인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주의 이름이 가까움”(개역개정)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주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74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멀리 서서 지켜 보시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고통 중에 당신의 자녀들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시인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파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곧 그분께 대한 증언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기도와 묵상 중에 마음으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합니다(2-5절). 하나님은 “정하여 놓은 그 때가 되면”(2절) 모든 것을 공정하게 판결하고 바로잡겠다고 하십니다. “땅의 기둥을 겨고하게 붙드는 자”(3절)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기에 땅을 흔드실 수도 있고 바로 잡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는 사람들이 “오만한 자들”(4-5절)입니다. 그들은 마치 뿔을 들고 주인에게 달려드는 염소와 같습니다.
낮출 것을 낮추고 높일 것을 높여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6-7절). 주님께서는 “거품이 이는 잔”(8절)을 들고 계십니다. 그 잔 가득히 “진노의 향료”(개역개정 “섞은 것”)가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쌓아 놓은 죄로 인해 받아야 할 진노의 잔입니다. 시인은 거만하고 오만하여 악을 일삼는 자들이 그 잔을 모두 받아 마시고 “그 찌꺼기까지 핥아야 한다”(8절)고 말씀하십니다. 악인들은 장차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로 진노의 잔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기도와 묵상 중에 깨달은 주님의 말씀을 전한 후, 결단의 고백으로 기도를 끝냅니다. “정하여 놓은 그 때에”(2절)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과 소망으로 시인은 주님만을 선포하며 하나님만을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9-10절). 시인의 상황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기도와 묵상을 통해 그가 현실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74장에서 철저한 절망 가운데 있던 시인은 믿음 안에서 희망의 끈을 찾습니다.
묵상:
시인은 기도와 묵상 중에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노의 잔을 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그 진노의 잔은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 잔이 다 채워지면 하나님은 그 잔을 쏟아 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인이 묵상한 것처럼 악인들이 그 찌꺼기까지 다 마셔야 합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심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죄악을 비판하면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마 23:32)고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노의 잔을 생각하셨입니다. 그 잔은 조상들의 죄악으로 인해 거의 채워져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남은 분량이 채워지면 하나님은 그 잔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아, 그런데, 하나님은 아삽이 예상한 것처럼 악인들에게 그 잔을 쏟아 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막 26:39)라고 청하십니다. 그 잔에 무엇이 들어있고 그것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예감 하셨기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잔을 대신 마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그 이후로 묵묵히 그 잔을 들어 마시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노의 잔을 비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보혈로써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낯설고 무서운 창조자 앞에 나아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값을 대신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 죄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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