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아삽의 시편이 계속 이어집니다. 아삽이 다윗 시대에 제사 음악을 관장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시편은 개인적인 문제보다는 국가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영적 구심점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찬양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예루살렘을 거처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두고 찬양을 올립니다. “살렘”(2절)은 예루살렘을 줄여 부르는 말로서 ‘평화’를 뜻합니다. “그의 장막이 살렘에 있고”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의미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참된 평화는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아삽은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 예배자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불화살을 꺾으시고, 방패와 칼과 전쟁 무기를 꺾으셨다”(3절)는 말은 성전에서 예배 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기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면 그분이 진실로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4-9절). 예배 중에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이야기들을 낭독하고 경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10절은 번역하기에 아주 난해한 구절입니다. 개역개정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라고 했고, 새번역은 “진실로, 사람의 분노는 주님의 영광을 더할 뿐이요, 그 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주님께서 허리띠처럼 묶어버릴 것입니다”(10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대해 분노 했던 사람들이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고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삽은 이스라엘 회중과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마땅히 경외할 분”(11절) 즉 창조주 하나님께 서원을 지키고 예물을 드리라고 요청합니다. 세상을 호령하는 군왕들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12절).
묵상: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요구하신 이유는 그분의 임재를 기억하게 하고 또한 그분의 다스림을 믿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배가 없는 삶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시야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눈이 흐려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흐려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이 의심되고,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적인 계산을 따릅니다. 그것이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정기적으로,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참된 예배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영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기억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고, 묵상을 통해 그분이 나의 과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회의, 불신, 두려움 혹은 절망에 대해 가장 강력한 처방약이 되어 주고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불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 무기를 꺾으신 사실(3절)을 기억하면, 지금 나에게 날아들어 오는 불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 무기를 꺾으실 것을 믿고 바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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