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9편: 우리가 기댈 언덕

해설:

이 시편은 아삽의 작품으로 되어 있지만,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점령 당하고 성전이 파괴될 때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삽의 시편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후대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거나, 아삽의 후손이 지은 것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시인은 먼저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돌무더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1절). 죽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어 새들과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있습니다(2절). 희생 당한 사람들의 피가 흘러 넘치고 있지만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조차 없습니다(3절). 이방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조롱합니다(4절). 

이것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역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벨론은 1년 반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후에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점령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야만적 행위들을 예루살렘 주민에게 자행했습니다. 

시인은, 이제는 심판을 멈추어 달라고 호소합니다(5절). 자신들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으니 진노의 표적을 원수들에게로 돌려 달라고 호소합니다(6-7절).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 조상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8절)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지금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조상의 죄로 인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자신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되었는지를 보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청합니다(9절).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10절)고 비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주님을 모독한 그 모독을 그들의 품에다가 “일곱 배”로 갚아 달라고 기도합니다(11-12절).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배로 갚아 주십시오”라는 말은 최대의 보복을 해 달라는 뜻입니다. 당시 바벨론 점령군이 얼마나 잔인하게 행동했는지를 기억하면 시인의 이 간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럴 때 주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영원히 찬양 돌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13절).

묵상:

78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듭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고집스러운 죄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는 이스라엘의 배반과 그로 인한 징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반역보다 더 컸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사랑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은혜로 끝납니다.

그런 믿음에 근거하여 시인은 유다 백성이 처한 상황을 봅니다. 유다 백성은 바빌로니아 군에 의해 참담한 불행을 겪었고 지금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주변 민족들은 유다의 참혹한 불행을 보며 그들의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이 그들의 반역의 죄로 인해 받은 대가임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쌓아 올린 죄의 결과이지만(8절) 그 죄에 자신도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9절). 언약 백성으로서 그들은 전체로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조상들의 죄에 자신을 연루시켜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댑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어떤 의도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인간의 반역의 죄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어서 빨리 우리를 영접하여 주십시오”(8절)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그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생각해서라도” 혹은 “주님의 명성을 생각해서라도”(9절)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이 목자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시 23:3)고 고백 했던 것과 같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분께 무엇인가를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분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 처해도 의심하지 말 것은 그분의 절대 불변의 은혜입니다. 그분의 그 은혜와 사랑으로 오늘 하루도 거뜬히 살아갑니다.  

6 responses to “시편 79편: 우리가 기댈 언덕”

  1. 지난 날들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잊고 멀리 떨어져 나아갔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주마등을 걸어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감사와 찬양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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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충분함을 기억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누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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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성도들을 조롱하며 살해하는 일이 자주일어납니다, 힘들고 핍박받는 주님의 양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령한 교회에 잠적해서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악의 집단들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루디아 같은 자매를 심한 고통에 넣는 악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문제 보다 더 크신 사랑과 구원의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 “땅끝까지 함께하시겠다” 을 믿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해결하시는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저희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믿음의 가족들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때를 손꼽아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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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우.러 전쟁으로 귀중한 생명이 사라져가고 그들이 흘린피의 절규와 유족들의 슬픔을 외면하지 마시고 전쟁을 일으킨 푸틴에게 쏟아 부어 주시옵소서. 온세계에 전쟁이 권력자들의 한없는 욕망을 추구함으로 발생 했다는 메시지를 깨달아 다시는 전쟁 전자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요. 주님 하나님의 정의가 온 세상을 덮는 그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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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포위 당하고 고립된 상태에 놓여 있다 마침내 함락됩니다. 백성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나라는 없어집니다. 고통과 절망은 오롯이 살아남은 이들의 몫입니다. 죽지 않았다 하여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이 죽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으니 이미 죽은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폐허가 된 예루살렘 거리에 죽은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땅에 묻어줄 사람 조차 부족합니다. 야훼의 백성, 야훼의 도성이라는 이름이 자랑거리에서 욕으로 바뀌었습니다. 살아남은 유다인들은 조롱과 멸시에 시달리고 그들의 마음은 분노와 절망, 후회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찾습니다. 부르고 또 부릅니다. 우리는 지금 이보다 나은 상황일까요. 내가 사는 나라는 침략을 받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군사력과 경제력을 더 크게 키우려고 애쓰는 것은 다 오늘 시편 같은 상황을 막겠다는 의지겠지요. 한 시대를 크리스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무와 권리를 뜻하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의무와 권리로 정리할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종교의 자유, 양심과 믿음의 자유가 시민의 권리로 자리 잡은 나라에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는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살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창조주로 부터 온 것이요 이것을 누리고자 애쓰는 것은 보호 받아야 할 기본 권리라고 여기는 나라에 살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 크리스찬의 값을 하나 더 얹어봅니다. 권리를 플러스한걸까요, 의무를 올린걸가요. 어느새 권리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의무에 대해서는 무뎌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을 매길 수 없이 (priceless) 귀중합니다. 비교할 수 없어서 값이라는 것을 매길 수가 없다는 뜻이지 값이 없다 (price-less)거나 싸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백성의 권리로만 본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아뢴다는 특권이 얼마나 값진 은혜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예루살렘 백성의 기도가 아무 것도 잃지 않으려는 나의 비대한 권리 의식을 깨뜨리는 아침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허영심과 이기심을 쳐 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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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돈과 명예와 상관없이 마음이 아픈 모든 이에게 위로를 주시는 주님. 남들보기에 하나 부러울것 없는 성공한 사람도 하나님을 몰라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사람일지도 모르며 허름한 옷과 작은 집에 한가지 반찬을 먹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는 기쁨으로 행복할수도 있습니다. 최근 푸틴의 얼굴은 웃음도 결의도 희망도 없는 마치 죽은 사람같은 무표정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암살과 실패의 두려움, 분노, 강박관념 등으로 남몰래 고통받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마음 깊은곳에서 죄책감이나 후회가 올라오기 마련입니다. 정치적 외교적 배경을 떠나, 그가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이 전쟁의 시작을 결정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읍니다. 그가 마음을 돌려 회개하고 주님 보시기에 선한 길을 선택하기를 기도합니다. 푸틴 그 자신의 영혼을 위해,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을 안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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