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는 이미 42편부터 49편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반기를 들어 사형을 당한 인물입니다만(출 6:24; 민 16장), 그 자손들은 살아 남아 다윗과 솔로몬 시대로부터 성전 악사와 문지기로 섬겼습니다. 이 시편은 ‘순례시편'(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여행 중에 부르던 노래)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순례시편은 120편부터 134편에 묶여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성전에 대한 애정을 고백합니다. 성전은 “주님이 계신 곳”(1절)이며 “주님의 궁전 뜰”(2절)입니다. 시인이 성전을 사모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 사람이 정인이 남기고 간 반지를 만지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시인은 성전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그립니다. 그는 성전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를 부러워합니다(3절). 자신도 주님의 집에 항상 머물러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4절). 그렇게 사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순례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길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순례길에 올라 있습니다(5절).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까지 순례자는 여러 가지의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눈물 골짜기”(6절)는 그 난관을 상징합니다. 원문에는 “바카 골짜기”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던 험한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 길을 걸어 온 순례자들은 이 골짜기에서 마지막 시련을 거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례자들의 마음에 은총을 주셔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하십니다(7절). “샘물”과 “가을비”(6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상징합니다.
장차 오르게 될 순례길을 상상하면서 시인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8절). 아울러 그는 “주님께서 기름 부어 주신 사람”(9절) 즉 이스라엘의 왕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야만 예루살렘 성전이 안전히 보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10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이토록 강렬하기에 수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순례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11절)가 되시기에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12절).
묵상: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임재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음부 가장 낮은 곳에 가도, 우주의 가장자리 끝에 가도 혹은 하늘 높이 올라가도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 안에 죽습니다. 하나님을 호흡하고 삽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고, 죽어 없어진다 해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현존에 깨어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습니다. 향기 가득한 정원에 있어도 3분이 지나면 더 이상 그 향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살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자주 잊습니다. 시인이 때를 정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간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깨우려 함입니다. 풍진에 파묻혀 사는 까닭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다고 느낄 때 먼 순례길에 오릅니다. 지금 그가 선 자리에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성소에 가서 믿는 이들과 함께 제사를 드림으로 그분의 임재에 자신을 깨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깨어나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문지기로 살아도 성전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성전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참새와 제비가 부럽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순례길에 오릅니다. 하나님 품 안에 살고 있지만, 그분의 임재에 더 환히 깨어나고 그분과 더 친밀해지기 위해 예배로,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그분의 품 깊숙이 닿기 위해 순례길에 오릅니다. 우리가 가는 길 중에 가장 복된 길은 순례길입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