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되어 있고, “에스라 사람 헤만의 마스길”이라고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가장 어두운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절망 가운데서 구원을 호소하는 다른 탄원시편들에는 한 두 절이라도 구원에 대한 희망 혹은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는데, 이 시편은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입니다”(18절)라는 절망적 고백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시편에서 우울증 환자의 전형적인 심리를 읽습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응답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1-2절).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지금 심각한 질병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3절). 그는 자신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며”(4절)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와 같다”(5절)고 탄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와 같으며 자신을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 던져 버린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6절). “주님은 주님의 진노로 나를 짓눌렀으며, 주님의 파도로 나를 압도하였습니다”(7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을 다른 사람 혹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그 탓을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우리 마음의 움직임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런 투정을 다 들어 주십니다. 그런 투정과 원망과 불평을 통해 우울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또 다른 문제는 외로움과 고독감입니다. 그의 상태로 인해 가까운 친구들마저 역겨운 것을 보는 것처럼 그를 멀리합니다(8절). 이 문제에 대해서도 시인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는 고통으로 인해 눈마저 흐려졌다고 고백합니다(9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그의 육신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종일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며 간구 했지만 응답은 없습니다. 시인은,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으니 제발 죽기 전에 응답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10-12절). 이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으로 넘어갑니다. 우울증에서 자살 충동이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다시금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 합니다(13-14절).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겪었고 지금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15-17절). 질병에서 오는 고통에 더하여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소외감으로 인해 그는 고독과 절망의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 있습니다(18절).
묵상:
살다 보면 이럴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듯한 혹은 하나님의 표적이 되어 고문 당하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이 자신을 훼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 받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느낌이 진실은 아닙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가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교란입니다. 그 느낌에 속아 감정을 따라 가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그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고통과 절망감이 너무 커서 “주님의 파도”(7절)에 압도 당한 듯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분노를 쏟아 놓고 떼를 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 대한 처절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불신의 사람은 절망의 때를 당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분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 앞에 분노와 절망만을 쏟아 놓는다 해도 그것은 그분께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칠흙같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대개의 탄식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혹은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다는 약속과 다짐이 나옵니다. 그런 대목을 읽을 때면 그 믿음과 소망이 너무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제로는 오랜 기도와 묵상 후에 믿음을 회복하고 드린 고백인데, 우리가 읽을 때는 그 시간적인 간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이 시편처럼 절망의 절규로 끝나는 기도에서 더 깊은 위로와 공감을 느낍니다. 어줍잖은 말로 위로하기 보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라 할 것입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