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8편: 절망 뿐인 기도

해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되어 있고, “에스라 사람 헤만의 마스길”이라고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가장 어두운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절망 가운데서 구원을 호소하는 다른 탄원시편들에는 한 두 절이라도 구원에 대한 희망 혹은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는데, 이 시편은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입니다”(18절)라는 절망적 고백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시편에서 우울증 환자의 전형적인 심리를 읽습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응답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1-2절).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지금 심각한 질병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3절). 그는 자신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며”(4절)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와 같다”(5절)고 탄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와 같으며 자신을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 던져 버린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6절). “주님은 주님의 진노로 나를 짓눌렀으며, 주님의 파도로 나를 압도하였습니다”(7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을 다른 사람 혹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그 탓을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우리 마음의 움직임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런 투정을 다 들어 주십니다. 그런 투정과 원망과 불평을 통해 우울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또 다른 문제는 외로움과 고독감입니다. 그의 상태로 인해 가까운 친구들마저 역겨운 것을 보는 것처럼 그를 멀리합니다(8절). 이 문제에 대해서도 시인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는 고통으로 인해 눈마저 흐려졌다고 고백합니다(9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그의 육신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종일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며 간구 했지만 응답은 없습니다. 시인은,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으니 제발 죽기 전에 응답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10-12절). 이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으로 넘어갑니다. 우울증에서 자살 충동이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다시금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 합니다(13-14절).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겪었고 지금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15-17절). 질병에서 오는 고통에 더하여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소외감으로 인해 그는 고독과 절망의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 있습니다(18절). 

묵상:

살다 보면 이럴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듯한 혹은 하나님의 표적이 되어 고문 당하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이 자신을 훼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 받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느낌이 진실은 아닙니다. 그것은 “속이는 자”가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교란입니다. 그 느낌에 속아 감정을 따라 가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그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고통과 절망감이 너무 커서 “주님의 파도”(7절)에 압도 당한 듯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분노를 쏟아 놓고 떼를 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 대한 처절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불신의 사람은 절망의 때를 당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분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 앞에 분노와 절망만을 쏟아 놓는다 해도 그것은 그분께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칠흙같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대개의 탄식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혹은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다는 약속과 다짐이 나옵니다. 그런 대목을 읽을 때면 그 믿음과 소망이 너무 성급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제로는 오랜 기도와 묵상 후에 믿음을 회복하고 드린 고백인데, 우리가 읽을 때는 그 시간적인 간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이 시편처럼 절망의 절규로 끝나는 기도에서 더 깊은 위로와 공감을 느낍니다. 어줍잖은 말로 위로하기 보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라 할 것입니다.

6 responses to “시편 88편: 절망 뿐인 기도”

  1. 끝이 없어 보였던 절망의 시간도 삶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있는 주님의 시간에 기대여 주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는 기도가 쉬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오늘의 나로 세워주신 주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감사의 기도가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Like

  2. 제 마음에 어둠을 몰아내시고 희망과 빛을 보내 주소서.

    Like

  3. 수년동안 주님께서 내 마음에 왕으로 오셔서 머리 부터 발끝까지 통치하여 주실것을 간구하였지만 아직도 가까운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주는 자신을 원망합니다. 주님! 살만큼 살았으니 차라리 생명을 거두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Like

  4. 오늘 아침 말씀을 읽고 묵상 하면서, 십자가에서 주님의 탄원(엘리엘리 라막 사박다니)을 생각합니다.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심한 고통을 격고있는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와 같은 믿음의 자매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을 잊지않고 자매의 온전한 치유의 소망을 갖고 지속적으로 주님께 간구 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가족들과 오랫동안 침묵하시는 주님이 가장 적절한때에 저희들의 기도제목들을 가장 적절하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

  5.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도 구름은 하늘위에서 움직이고 있고, 밤이 지나고 낮이 되는 듯이, 하나님께서도 제 삶의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신실하게 일하고 계심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에 더 집중하는 하루입니다.

    Like

  6. 형제없이 혼자 자라는 사람의 아킬레스건은 자기만 그런 줄 안다는 착각입니다. 무서우면 자기만 무서운 줄 압니다. 불안해도 자기만 불안한 줄로 생각합니다. 좋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신나는 일이 생기면 자기한테만 신나는 일인 줄 압니다. 남들도 그렇게 느끼고, 힘들어 하고, 그런 감정들을 이렇게 저렇게 풀고 정리하며 산다는 걸 알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혼자 자라면 감성적인 면이 과다거나 과소이기 쉽습니다. 자신을 객관화 해서 중간에 놓고 보는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혼자 큰 친구와 만나면 우리끼리만 통하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누군가에게 기대야 할 때엔 각각 다른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모자라서 그러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친구나 부부 사이가 매사에 50대 50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어떤 때 어떤 일은 어느 한 쪽이 90을 책임져 주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한 쪽이 다 감당하기도 합니다. 전혀 맞지 않는 ‘계산’인데도 두 사람 사이엔 문제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셈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처럼 묵직한 바위 같은 것이 가슴을 누르는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기도는 세상에 자기만 혼자 남은 것 같은 때 나오는 탄식입니다. ‘나만 그런 것 같은’ 시간입니다. 나만 그런 것 같으니까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해결할 수 있는 일보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걸, 또 상당 부분의 일은 그냥 둬도 괜찮다는 걸 빨리 깨우칠수록 감정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 옆에서 괜찮다고, 지금 그렇게 느끼는 좌절과 분노는 너 혼자 짊어져야 하는 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줘야 합니다. 말을 안 해도 옆에 있어 주는 것이 곧 메시지가 되기도 합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인생이 안 풀리고 괴로운 지금 하나님은 그에게 샌드백이 되어 주십니다.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 가서 눈을 흘기는” 용기 없고 소심한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때린 사람한테 대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기도를 하지 않겠지요. 시인의 기도가 허망한 것은 아닙니다. 주가 더 이상 기억하지도 않는 사람, 더 이상 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가 된 것 같다는 그의 두려움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주가 무서워 앞이 캄캄하다는 고백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회복의 신호라고 믿습니다. 밤낮으로 주님을 부른 시인을 기억하신 주께서 나의 연약함도 기억하신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 뒤로 숨겨 주시고 위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Lik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Blog at WordPress.com.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