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제 4권의 첫 번째 시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지혜시편에 속하는데, 시편 편집자는 각 권을 지혜시편으로 시작합니다(1, 42, 73, 90, 107). 4권에는 모세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먼저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하심(1-2절)과 인생의 유한성을 대조시킵니다(3-6절). 하나님은 세상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계셨던 분이고, 세상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의 차원에 머물러 계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4절)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분의 영원성에 비하면 인생은 유한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에 비하면 인간은 “존재한다”고 표현할 수도 없을만큼 덧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거룩성에서도 뚜렷이 드러납니다(7-10절). 하나님은 절대 거룩이십니다. 그분 앞에 서면 인간은 자신의 죄 성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7절). 하나님은 마치 영적인 MRI 기계와 같이 그분 앞에 선 우리의 모든 죄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시고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장수의 축복을 누렸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서고 보면 자신의 인생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고백에 근거하여 시인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구합니다. 첫째, 유한한 인생을 살아갈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구합니다(11-12절).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12절)라는 말은 인생의 유한함을 늘 인식하고 하루 하루 충실하게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 지금 당한 재난에서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3-16절).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재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셋째, 매일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17절).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은 자신이 이룬 업적이 원수들에 의해 무너지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유한한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소망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묵상:
이 시편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가장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과 단테가 이 시편을 인용했고, 다석 유영모 선생은 12절을 따라 매일 살아온 날 수를 일기에 적어 놓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분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유한하고 덧없는 인생이 하나님의 영원성에 잇대어 집니다.
한 순간에 사라져 없어질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자신만을 본다면 아무 의미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장 급성장하는 ‘무신론교’의 결론입니다. 무신론적 진화론에 의하면,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사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순간, 인생에는 의미가 깃듭니다. 덧없어 보이던 인생에 절대적 가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진화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탐구하는 학문이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자는 학문이 아닙니다. 무신론자들은 진화 과학을 이용하여 무신론이 ‘과학적 결론’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은 유익한 학문이지만 과학이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영적인 통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분의 계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인처럼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16절)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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