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에는 표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원래 90편의 일부였던 것이 편집 과정에서 별도의 시편으로 나뉘었을지 모릅니다.
시인은 깊은 묵상과 기도 중에 자기 자신에게 말합니다. 1절부터 13절까지는 시인의 내면에서 두 자아가 나누는 영적 대화입니다. 여기서 “너”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가리킵니다. 그는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 아래 살며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1절) 살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팔레스틴의 상황을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하루 종일 따가운 태양볕이 내리 쪼이는 그곳에서 나무 그늘을 만나는 것은 큰 위안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마치 뜨거운 대낮에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자 내면의 또 다른 자아가 “나는 주님께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다”고 대답합니다(2절).
그 말을 듣고 다른 자아가, 그가 믿는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여러 가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응답합니다(3-13절). 그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위험 즉 죽을 병(3절), 밤에 찾아드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5절), 흑암을 틈타서 퍼지는 염병, 백주에 덥치는 재앙(6절) 그리고 악한 자들로부터의 공격(7-8절)까지 열거합니다. 이 모든 위험으로 인해 다른 사람은 다 넘어져도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를 해치려는 악인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9절) 그에게는 “어떤 불행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며 “어떤 재앙도 가까이하지 못할 것”(10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셔서 오고 가는 모든 길에서 그를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1-13절).
이렇게 내적 대화로 묵상을 이어가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인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면의 두 자아의 대화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충격입니다.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는 말이나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14절)는 말은 그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15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그가 고난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감미로운 내적 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그 어떤 고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 했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다만,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16절).
묵상: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에 머물러 사는 사람에 대한 이 시인의 고백은 참으로 감미롭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불행도, 그 어떤 재앙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네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네게는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7절)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질병은 닥쳐 오고 불행이 엄습해 옵니다. 적의 공격을 받아 모두가 쓰러질 때 전능하신 분을 의지하는 사람도 함께 쓰러집니다. 그뿐 아니라,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손해와 반대와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 될 때가 많습니다. 죄악 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은 불행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이 시편의 전반부에서 표현한 기대감은 순진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순진한 기대는 자주 시험 거리가 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11절과 12절을 인용했던 것(마 4:6)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순진한 기대감을 가지고 계셨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렇게 순진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시인의 순진한 기대감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15절)고 답하십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사람도 때로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만 고난을 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 중에 함께 하시면서 그 고난을 통과할 수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피하게 해 주는 마법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새롭게 빚어지고 고난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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