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권고하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새 노래”(1절)는 “새로 지어진 노래”라는 뜻이 아니라 “완전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영광에 어울리는”(8절) 노래를 말합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 서게 되면 저절로 경탄을 하며 그 작가를 찬양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면 그분을 향한 찬양과 경배가 솟아 나옵니다. 1-2절에서 “노래하여라“는 동어 명령을 세 번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찬양은 “날마다”(2절) 계속되어야 합니다. 또한 “만국에” 그리고 “만민에게”(3절) 그 사실이 알려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신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들은 모두 우상입니다(4-5절). 참된 신은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한 분 뿐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주님의 성소에는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6절)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는 누구나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7-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와 세계가 질서 가운데 운행되고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10절). 알고 보면,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이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11-12절).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며 그분께 대한 찬양과 경배를 요청한 후에 시인은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13절)라고 선언합니다. “심판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스리다”라는 뜻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이 ”심판하다“라고 번역한 것을 새번역은 ”다스리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10절, 13절).
하나님의 다스림은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사건이 되고 거룩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시인은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13절)라고 말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성소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인류의 일상사에 개입하셔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믿는 이들에게는 소망이요 위안이며 또한 기쁨입니다. 그분은 정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고 진실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다스림을 기다립니다.
묵상:
멀리 계신 하나님은 또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렘 23:23). 온 우주 끝에 가서도 만날 수 있는 그분은 또한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온 우주의 우주보다 크신 그분은 또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근심과 염려까지 아십니다. 온 우주를 운행하고 계시는 그분은 또한 오늘 하루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전능자라고 부르고 절대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언어 중에 최대치를 의미하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분에 대해 뭐라 말하는 것은 아직 그분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진면목의 한 조각만 보아도 우리는 입을 다물고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날마다, 어디서나 그분을 생각하며 찬양과 경배를 올립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영광과 위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 그것이 우리의 매일의 관심사입니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13절)라는 시인의 말은 ‘알지 못하고 한 예언’입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한 말인데, 그것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13절)라는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운데 오셨던 주님은 장차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며 천국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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