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9편: 절대치의 거룩과 절대치의 사랑

해설:

93편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시편 묶음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93편에서처럼 시인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1절)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룹”(1절)은 지성소 안에 자리 한 언약궤(증거궤) 뚜껑에 만들어진 형상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존재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거기에서 너를 만나겠다”(출 25:2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곳을 영어로는 mercy seat이라고 부르고, 우리 말로는 ‘시은소’라고 부릅니다. 이 시편은 성전 안에서 제사 드릴 때 불렀던 찬송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모인 백성은 두꺼운 휘장에 가리워진 언약궤를 생각하며 이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은 거룩하시다!”라는 고백을 세 번 반복합니다(3절, 5절, 9절). 히브리어의 ‘카도쉬’는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거룩하시다!”라는 말은 “주님은 다르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온 우주와 세상 만물과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됩니다.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들은 그 어떤 것도 거룩하지(“구별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분 즉 피조물과 다른 존재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 뿐입니다. 그분은 피조물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의 총체이시며 또한 그 모든 것의 완전체이십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그분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1절).

시인은 하나님의 차별성이 특별히 그분의 정의와 공의에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4절). 하나님이 인간과 다르다는 사실은 정의와 공평에 대한 그분의 기준과 그것을 실행하시는 그분의 능력에서 드러납니다. 우주 만물의 질서와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면 그분의 정의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또한 그분의 정의와 공의를 증거합니다(6-7절).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려 절하며 경배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9절). 정말 우리와 다른 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 그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우리는 때로 하늘을 우러릅니다.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비싼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납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세상과 단절한 채 깊은 산 속에 숨어들고 싶어집니다. 세상 살이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 우리는 일체의 활동을 멈추고 잠잠히 머물고 싶어집니다. 또 때로 우리는 무엇인가에 몰입하여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싶어집니다. 매일 반복되는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갈망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깊고 강렬한 갈증에서 옵니다. 초월자, 절대자, 완전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그렇게 표출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절대적인 차이를 가진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분의 절대치의 거룩 앞에 서면 우리는 자신의 절대치의 부정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에 눈 뜨는 순간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또한 절대치의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 주십니다. 

그분의 절대치의 거룩과 절대치의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분을 높여 경배하고 또한 그분께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발돋움하여 이 풍진 세상에서 솟아날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전능자의 그늘에 들어갈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앞에 설 때 마다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오직 주님만이 거룩하시다!” 

5 responses to “시편 99편: 절대치의 거룩과 절대치의 사랑”

  1. 주님은 창조주 이시고 저희들은 피조물입니다, 주님이 거룩 하시니 우리도 거룩 해야하는데 너무나 더러워 불가능 입니다. 그러나 샘물과 같은 보혈로 씻으시고 정하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웃과 더불어 끝없이 크고 깊고 넓고 높은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믿음의 자매가 2차 항암 치료 받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힘과 용기를 허락하시고 함께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Like

  2. AI가 고장이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어뚱한 언어와 행동으로 제작자를 당황하게 만들 듯 우리 피조물도 주님의 창조 원본 본체에서 벗어나 죄악으로 빠진 인류를 불쌍이 여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제 자리로 환원시켜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에 감히 접근 할수 없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주시는 주님 오늘의 하루를 주님께 의탁합니다, 오늘 하루도 평화롭게 다스려 주십시요.

    Like

  3. 40 여년간의 광야 생활은 축복의 시간이 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에는 구름기둥 낮에는 불기둥으로 갈바를 알지못하는 피조물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양같은 인간은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려는 못된 고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하나님은 참으시고 또 참으시다가 결국에는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삼으시어 흘리신 보혈로 더러운 반역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끝없이 넓고 깊은 사랑의 하나님을 매일 매일 찬양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오늘도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Like

  4.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지, 언제 처음 믿게 되었는지, 어떤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는지…이런 질문들은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별 어려움 없이 주고 받는 질문입니다. 개인마다 다른 답이 나오지만 큰 틀 안에서 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비교적’ 순탄하고
    평이한 신앙의 자취가 있는가 하면 보다 더 극적이고 굴곡진 여정이 있습니다. 요즘 인공지능의 인식 능력과 분석력을 이용해 유저
    (user)와 소통이 가능한 상태에서 챗봇 chat bot 이 쓴 연설문이나 주관식 답변, 챗봇이 그린 그림 등을 보게 됩니다. 챗봇이
    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으면 구분해 낼 수 없을만큼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간증문이나 신앙고백 수필도 인공지능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섬뜩하지만, 인공지능에게 시편 151편을 읽고 소화한 뒤 152번째 시편을 써보라고 명령을 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도 인공지능이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센터에 전화를 하면 자동 응답기능이
    우선적으로 답을 합니다. 처리가 잘 안되어 ‘사람’하고 대화하고 싶다고 하면 그때야 사람이 나옵니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드라이브 쓰루
    drive thru 직원이 인도의 어느 사무실에서 이어폰 꽂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던 말을 들은 게 십년도 더
    되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은 아니란게, 실제로 우리는 창구에서 직원 얼굴을 보며 주문을 하니까 넓은 인도 땅 어딘가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문 받는 것은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그런 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은 컴퓨터로 가능해진 일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런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시편처럼 우리와는 너무 다른 하나님, 우리가 감히 상상하거나 추측하거나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더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을 척척 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을 더욱 잘 보게 되었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해주는 기계는 있어도 우리를 대신해서 아파해 주거나, 먹어
    주거나, 사랑해 주는 기계는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대신 걸어주는 챗봇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와
    아론의 제사를 받으시고, 사무엘이 부르면 답하시던 (6절) 주님이 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인도해
    주소서.

    Like

  5. 남의 인기와 학력, 그리고 경제적인 압도함이 내게 더이상 인상적인것도 화나는 것도 아니게 하소서. 내 귀한 시간을 그런 것을 쳐다보며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의 광할함, 오늘 내게 주신 생명, 지저귀는 새소리, 아침 이슬, 길귀퉁이의 파란 새싹으로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리게 하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것이 너무나 대단하게 보이고, 주님의 천재적 예술 감각이 놀라울 뿐입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Lik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Blog at WordPress.com.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