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은 가장 많이 사랑 받는 시편 중 하나이며, 찬송의 가사로 가장 자주 사용되어 온 시편입니다. 짧은 시편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열정이 가득합니다. 사용된 단어와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시편 전체를 통째로 외워 낭송하기에 가장 좋은 시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을 회중에게 전하기 위해 일곱 개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환호성을 올려라”(1절), “기쁨으로 섬기라”, “그 앞으로 나아가라”(2절), “알아라”(3절), “노래를 드려라”, “들어가거라” 그리고 “찬양하여라”(4절).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몸의 모든 기관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정도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중간에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3절)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알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맛보아라” 혹은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해 보아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목소리와 몸짓과 온갖 악기로 그분을 찬양하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그분이 하신 일 때문입니다(3절). 그분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소유이며,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의 양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의 성품 때문입니다(5절). 그분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칩니다. 인격이 출중한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그 사람을 존경하고 높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를 깨달아 알면 그분을 향한 경외감이 마음에서 솟아 오릅니다.
묵상:
우리 인간은 우연히, 저절로, 사고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정의와 거룩함과 정결함과 선함과 자비로움과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와 부정함과 악함과 인색함과 추함이 널려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더 심하게 만드는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 반대를 향한 열망과 갈증이 있습니다. 비록 부정하게 살지만 정결한 것을 추구하고, 비록 불의하게 살지만 정의를 갈망하며, 비록 추하게 살지만 아름다움을 열망합니다.
그런 까닭에 보기 드문 인격을 만나면 그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고, 좀처럼 볼 수 없는 정의로운 이야기를 만나면 감동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거룩함과 정결함과 선함과 자비로움과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지어진 존재이기에 이러한 열망과 갈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러릅니다. 그분에게는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갈망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반증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유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그분에게만 모든 선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을 높입니다. 그렇게 예배 드리는 중에 우리는 그분의 존귀와 위엄,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분의 정의와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됩니다. 그 체험은 우리의 예배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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