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4편: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해설:

시편 103편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노래했는데, 104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두고 찬양을 올립니다. 이 시편은 이어지는 105편과 106편과 짝을 이룹니다. 시인은 104편에서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를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묘사한 다음, 105편과 106편에서 그분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다스려 오셨는지를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내용 상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노래합니다(1-4절).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5-9절), 그 세상 안에서 온갖 생명이 살게 하십니다(10-18절). 그분은 우주의 운행을 주관하셔서 온갖 피조물이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19-30절). 이 고백 끝에 시인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31-35절).   

그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의 더 없이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온 우주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피조 세계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영광을 본다면 그분 앞에 엎드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4절).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5-9절).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의 서사를 시로 바꾼 듯한 느낌입니다. 피조 세계는 그분이 정하신 원리와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 안에 온갖 생명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이 복을 누리도록 피조 세계를 돌보시고 다스리십니다(10-18절).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구절마다 “주님께서…(개역개정, “여호와께서”) 혹은 “주님은…”이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시인은 거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봅니다. 온갖 피조물이 주어진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질서있게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19-30절). 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가져가기도 하시고 죽은 생명을 다시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30절)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고백인데, 후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날 일(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묵상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죄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설 것을 촉구합니다(33-35절).

묵상: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자연이 연출하는 놀라운 다양성은 진화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은 자연 세계의 다양성이 창조자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말은 진화 과학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화 과학이 증명해 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가 아니라 창조자의 위대하심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미술관에 가서 위대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작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피조 세계를 감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때로 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를 보면서 혹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을 보면서 우리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자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 1:20)라고 썼습니다. 

피조 세계를 감상하면서 창조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마치 작자 미상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람회를 감상하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감상자는 전시된 미술품들을 하나씩 관찰하면서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추정해 봅니다. 작품을 모두 돌아 보고 한 구석에 서서 작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전람회 장으로 들어옵니다.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작가가 전람회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감상자는 그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에 다시 작품을 돌아 봅니다. 모든 작품이 새롭게 보이고, 작가에 대해 더 잘 알게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피조 세계를 감상하며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일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 더 분명히 알기 위해 더듬어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듬어 창조자를 알 방법은 없습니다. 작가가 전람회장에 들어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다시금 그분의 작품을 감상합니다. 그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우리의 찬양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6 responses to “시편 104편: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1. 창조 질서를 통해 주님의 무한하신 위대함을 찬양합니다, 사람의 머리로 수만년을 노력하여 이해하려했던 우주의 신비함을 통해 감히 아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는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다시 흙으로 돌아 갈 육체에 주님의 성령을 불어 넣어주시어 하늘 나라의 소망을 허락하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지으신 생태계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그 질서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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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상상 할수없이 큰 무한의 우주를 운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모든 생명체를 주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인류의 역사를 간섭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수없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믿음의 식구들과 더불어 생명의 하나님을 세상에 소개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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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다스리시고 영원히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을 오늘도 경배드리며 찬양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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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것이 무식하고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 때입니다. 보수적이고 교회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사석에서 설마 창조론을 믿는건 아니시죠 라며 농담하는 영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내 마음을 담대하게 먹기를 기도합니다. 무신론자, 교회를 약하게 하는 자들의 환심과 동의를 얻기위해 타협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부모가 나를 낳으신것 내가 본적 없지만 살면서 그 사실을 내가 믿었습니다. 창조하신 때에 내가 없었지만 자연을 둘러보며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느낍니다. 그 믿음을 지킬수 있도록 힘을 주실것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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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봅니다. 만물을 운행하시고 아무런 오차 없이 질서있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봅니다. 창조물인 우리가 창조자를 찬양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 큰 감격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은혜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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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어제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무릎 위에 이런 문신을 했습니다. ‘self’ ‘made.’ 오른쪽 무릎 위엔 ‘셀프,’ 왼쪽 무릎 위엔
    ‘메이드,’ 즉 보는 사람이 읽을 땐 ‘셀프 메이드’ – 스스로 만들었다, ‘자수성가’라는 뜻입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는 순간 아침
    묵상 때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찬양하는 시편을 묵상하는 이 때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하는 태투였습니다. 본인이 그런 태투를 하게 된 배경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고,
    태어난 환경이 너무 힘들어 뭐든지 자기 손으로 일구어야 했다는 선언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절대로 셀프
    메이드가 아닙니다. 무생물, 생물, 자연, 사람, 우주…어느 하나도 셀프 메이드가 아닙니다. 진화의 이론과 과학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과학자들도 창조를 말할 때 셀프 메이드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셀프 메이드’가 없는 걸 알지만
    ‘자수성가’의 뜻은 잘 압니다. 자수성가를 응원하고 선망합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귀족이 한 편에, 자기 두 다리로 우뚝 선
    (팔이나 가슴이 아니라 무릎 위에 태투를 한 것도 그런 뜻인지 모릅니다) 자수성가의 평민이 다른 한 편에 있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마주 하는 많은 모순 가운데 하나처럼 보입니다. 셀프 메이드는 없는데 셀프 메이드처럼 살아야 하는 인생. 오늘 시편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우쳐줍니다. 피조물 가운데서 특별히 물을 소재로 찬양합니다. 깊은 바다와 샘물에서 부터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에
    이르기까지 주님이 만드신 물 덕분에 생명이 지속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주님이 먹이를 주시기를 기다리고, 얼굴을 돌리시면 두려움에
    떱니다 (29절). 주님의 입김으로 살아나고 다시 창조되며 새롭게 지어집니다 (30절). ‘self-made’ 가 아니라
    ‘God-made’ 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나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셀프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찬양하는 날, 셀프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날, 셀프는 없어지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날…그
    날을 고대하며 걸어갑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지으시고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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