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2편: 경외하는 사람의 복

해설:

이 시편도 111편처럼 각 행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어진 ‘이합체’ 시편입니다. 앞의 시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다면, 이번 시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축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복 받는 것이 믿음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에 서서 살아가면 여러가지 복을 누립니다. 여기에 나열된 복의 종류들은 몇 가지 예를 든 것입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복이 자손들에게 이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2절).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의 죄값은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이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받을 복은 수천 대 자손에게까지 이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출 20:5-6). 각자의 운명은 각자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의해 결정 되지만, 개인의 선택과 결정을 넘어서는 차원의 어떤 힘이 있습니다. 지금 나의 선택은 내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이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번영의 복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3절). 이것도 역시 율법을 통해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바르고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잘 되도록 지어졌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실패하고 손해 보고 가난해지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자신이 받은 복을 유통시킵니다. 

시인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좋은 성품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4-5절).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동안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알게 되고 감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벧후 1:4) 자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과 물질을 사용하여 이웃을 살피고 돌봅니다. 그로 인해 그는 더욱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존재와 삶이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지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6-9절). 믿음의 사람도 나쁜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식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습니다(7절).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악한 사람들과 엮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든든히 서서 악한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마침내 보게 될 것입니다(8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기에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을 믿기에 어떤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갈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1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생각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주인은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 25:30)라고 말합니다. 

묵상: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각자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좋은 것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십니다. 그런 분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그분을 알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것 뿐입니다. 우리는 그냥 좋아서 하나님을 찾고 좋아서 그분을 찬양하고 좋아서 그분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것이 손해를 불러 온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 해도, 혹은 그것이 멸시와 박해를 불러 온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난 이상 다른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믿음은 우리의 인격과 삶의 방식과 삶의 색깔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창조 원리를 따라 온갖 복을 누리게 됩니다.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깊어지는만큼 많은 복을 누립니다. 성품이 변화하는 복,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평안의 복 그리고 손 대는 것마다 형통하는 복을 누립니다. 그뿐 아니라, 그 복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들에게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 모든 복이 자신에게 고여 있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 복을 유통시켜 이웃을 복되게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복의 근원”(창 12:2)이 되는 것입니다.  

6 responses to “시편 112편: 경외하는 사람의 복”

  1.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자체를 사랑했는지, 혹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받기위해
    살아왔는지 성찰하는 말씀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들을 염두에 두지않고 그복을 꼭잡고
    누리는 비천한 처지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힘들고 멸시천대를 받더라도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것이 신령한 하늘의 축복인것을 깨닫고 그 축복을 위해 믿음의 가족들과 더불어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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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진으로 인해 시리아와 터키는 아비구환의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절실하며 절망에서 혜처나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주님의 자비를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갈수있는 힘을 주시고 이번 주 부터 있을 우리 교회 차원의 구제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참여하여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말로만 정의 로운게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 정의가 표현되게 하시어 피해 복구 속에 있는 그들을 돕는데 마음과 재물이 함께 움직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부터 있을 이재철 목사님의 부흥회를 통해 그 동안 싸여졌던 허물을 되돌아 보게하시고 주시는 말씀으로 씻어내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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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새벽에 식탁에 앉아 성경을 펴면 머리에 불이 들어온 듯 환해집니다. 온 on 스위치가 켜진 듯 마음과 머리가 깨어납니다. 하루 중 다른 시간에도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묵상을 할 수 있지만 새벽 시간의 독특한 충만감이 있습니다. 오로지 내 것인 것 같은, 주님이 바로 여기 계신 것 같은, 다 이겨낼 것 같은…그런 자신감이 있습니다. 성경이 마치 만남의 장소인 듯, 주님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약속의 장소인 듯 느껴집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우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깔았던 컴퓨터는 화면을 열면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 라는 물음이 떴습니다. 기계인 컴퓨터와 사용자인 인간이 ‘만남’을 가진다는 뜻에서 데이트를 연상 시키기도 하고 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주인님, 무엇을 해 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도 하는 홍보 문구였습니다. 성경책을 열어야만 주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성경에서만 주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는 언제라도, 어디라도 다 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묻고 구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하루든 백년이든, 여기든 저기든 다 복이고 상이고 선물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이 하자는대로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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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하나님을 닮아가는 영광을 가지게 됨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의 향기가 나는 삶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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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봅니다. 모든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슴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쏟아 부어 주시는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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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게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의로운 마음에 의로운 행동을 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요. 그런데 불의한 마음이면서도 의로운척 위선적인 행동하는 것이 불의한 마음에 불의한 행동을 하는것보다 낫다고 장담하기 힘듭니다. 적어도 후자는 솔직하다고 할수도 있거니와, 어쩌면 개선의 여지라도 있으니까요. 내 마음이 온전히 숨김없이 밖으로 표출되기를 소망합니다. 설사 내 행동으로 욕을 먹는다 하더라도요. 그래서 내 행동이 주님으로인해 점차 정의로와짐을 보고 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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