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1-10절: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해설:

앞에서 누가는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2:43)고 했는데, 그 중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문 곁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베드로가 온전하게 해 준 것입니다.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1절)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아침, 오후, 일몰) 기도한 습관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성전 입구에는 장애인들이 진을 치고 구걸을 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실수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속죄 제사로 해결할 수 있지만 고의로 저지른 죄는 선행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구제’(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에 열심을 냈습니다. 제사 드리러 성전에 온 사람들은 구제하는 일에 더욱 너그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전 입구는 도움 받기에 가장 좋은 길목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2절)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눈여겨”(4절) 보고 “우리를 보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줄 줄 알고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6절) 하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온전하게 된 후에 그는 난생 처음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8절). 육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율법이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신적인 장애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듯 율법에 의해 차별 받던 사람들을 회복시켜 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장애로 인해 구걸하던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고 이상하게 여깁니다(9절).

묵상:

성령께서는 때로 우리를 억압하는 장애와 한계를 극복하게 하기도 하고, 우리가 인습에 젖어 당연히 생각하던 차별과 장벽을 넘어서게도 만듭니다.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에게 일어난 일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장애에 갇혀 있던 그 사람은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함을 얻습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기대했던 것은 몇 푼의 돈이었는데, 성령께서는 그에게 온전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온전함을 얻은 그는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육신적인 장애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영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타고난 장애로 인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주려 하신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를 벗어나 그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등지고 살아가던 상태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 회복과 치유가 강력해지면 때로 육신적인 질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엉켰던 관계가 풀어지기도 하며 거대한 사회 변혁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3 responses to “사도행전 3장 1-10절: 온전케 하시는 성령”

  1. 주님 제가 교회앞에서 헛된 세속적인 우상을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 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주님의 지성소에 들어갈수있는 특권을 얻었으나 아직도 교회 문턱밖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주님 닮기를 원합니다. 시들어 가고 지친
    영혼들을 새롭게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빛이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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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특별한 일이 걸인에게 일어났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걷고 싶다고 말한 것이 아닌데 베드로와 요한을 그를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10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본문인데 걸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기적의 순간이 들어 있고, 관계의 회복에 관한 예도 들어 있습니다. 변화에 대해서도 말하고, 변화를 목격한 주변 사람들에 관해서도 언급합니다. “어느 날 오후 3시…” 라디오가 오락을 책임지던 옛날에 성우 목소리로 들었을 법한 시작입니다. 사건이 일어날만한 날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특수성을 지닌 날이나 시간이 아니었고 사건으로 인해 그 날이 특별해 지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언제고 또 일어날 수 있다는 뜻도 담겨있지 않을까요. 성전이 아니라 성전 문이 사건의 장소입니다. 성전 문 주변에 구걸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더럽고 누추한 옷, 불구의 몸, 불쌍한 표정, 간절한 목소리…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기도하러 가는 중입니다. 자기의 탄원을 올리기 전에 타인의 탄원부터 듣는 셈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그들에게 구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를 베드로는 “눈여겨 본 후에, ‘우리를 보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걸인은 기대에 차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걸인이 바라는 것이 돈이요 물질인 것을 아는 베드로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 비록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으나 그보다 더 좋은 것, 당신이 아직 모르는 귀한 것이 있는데 그걸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요 유일한 것이기도 한 보물을 당신과 나누겠소…라는 말을 합니다. 그 보물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이며, 그 이름은 걸인을 걷게 합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습니다. 껑충껑충 뛰기도 합니다.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그가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던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로 인해 크게 놀랍니다. 예수님이 환자들을 고치신 이야기에는 나서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고, 나중에 장애를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 놓으셨습니다. 장애로 인해 떨려난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회복은 형평성 equity, 공정 fairness, 공평 equality을 지향합니다. 소외나 제외를 없앱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진 능력은 회복을 가져 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회복을 말할 때 우리는 곁을 내주는 일도 같이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초대였을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8절)” 기도하자는 초대였을 것입니다. 어느 날 오후 3시에 나도 주님의 초대를 받아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나도 어느 날 오후 3시에 타인의 탄원을 듣고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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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을 100% 믿고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베드로가 선포한 것처럼 성령님께서 내안에 임재하시므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내가되기를 기도 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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