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앞에서 누가는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2:43)고 했는데, 그 중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문 곁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베드로가 온전하게 해 준 것입니다.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1절)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아침, 오후, 일몰) 기도한 습관을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성전 입구에는 장애인들이 진을 치고 구걸을 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실수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속죄 제사로 해결할 수 있지만 고의로 저지른 죄는 선행으로 상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구제’(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에 열심을 냈습니다. 제사 드리러 성전에 온 사람들은 구제하는 일에 더욱 너그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전 입구는 도움 받기에 가장 좋은 길목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2절)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눈여겨”(4절) 보고 “우리를 보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줄 줄 알고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6절) 하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온전하게 된 후에 그는 난생 처음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8절). 육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율법이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신적인 장애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듯 율법에 의해 차별 받던 사람들을 회복시켜 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장애로 인해 구걸하던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고 이상하게 여깁니다(9절).
묵상:
성령께서는 때로 우리를 억압하는 장애와 한계를 극복하게 하기도 하고, 우리가 인습에 젖어 당연히 생각하던 차별과 장벽을 넘어서게도 만듭니다.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에게 일어난 일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장애에 갇혀 있던 그 사람은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함을 얻습니다. 그가 베드로에게 기대했던 것은 몇 푼의 돈이었는데, 성령께서는 그에게 온전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온전함을 얻은 그는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육신적인 장애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영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타고난 장애로 인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주려 하신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를 벗어나 그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등지고 살아가던 상태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 회복과 치유가 강력해지면 때로 육신적인 질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엉켰던 관계가 풀어지기도 하며 거대한 사회 변혁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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