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1-19절: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해설:

스데반의 처형과 그 이후의 교회 박해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사울은 예루살렘과 유다에서의 박해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제사장의 친서를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에까지 원정을 갑니다(1-2절). 그곳으로 도피한 신도들을 체포해 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십니다(3-7절). 사울은 강렬한 빛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고,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마스쿠스에 이르러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묵상합니다(8-9절). 그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심한 충격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 때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10절). 5장에 나왔던 아나니아와는 동명이인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고,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악명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그가 왜 다마스쿠스에 와 있는지도 알았기에 주저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시면서 가라고 하십니다(11-16절). 아나니아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 손을 얹고 기도해 줍니다. 그러자 사울은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습니다(17-19절). 

묵상:

사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를 허락하시고 우주에는 자연 법칙을 주시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일반 섭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계공처럼 우주와 인간을 저절로 돌아가게 하고 손 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와 우주의 운행을 지켜 보시면서 때로 특별하게 개입하십니다. 그것을 ‘특별 섭리’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우주의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한 섭리의 손길이 사울의 인생 여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특별하게 개입하셔서 사울의 인생 여정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삶의 방식은 ‘자율’입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를 따라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신율’을 더 높은 이상으로 삼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조율하는 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이후의 사울의 삶은 ‘신율’을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꿈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 실현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5 responses to “사도행전 9장 1-19절: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1.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저는 아나니아의 행동과 순종을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크리스챤들에게는 악명높은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대로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순종함으로 그 말씀을 행합니다. 똑같은 상황에 나는 순종할 수 있을까? 고민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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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성서의 인물 가운데 사울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신약 성서에 스며 있는 그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와
    관점은 바울 (사울)의 신학을 해석하고 이해한 목사님들의 설교로 처음 형성되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 듣는 말씀의
    대부분도 바울의 논리를 받아 들이고 따라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라는 어떤 세계/나라/가 있습니다. 실제로 가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가고 싶다면 언젠가는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나라가 처음 생겼을 때 가 본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 본 이들
    중 몇몇 사람은 기록도 남겼습니다. 그 세계는 완성 되지 않았지만 완전했고,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르지만 경험하는 것은 서로 통하고
    같았습니다. 한가지 모습으로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기에 지금도 그 때처럼 가 볼 수 없지만 예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과 애정은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가 본 사람들 중 몇몇이 남긴 기록 덕분입니다. 바울은 거의 맨 나중에 가 본
    사람입니다. 그의 처음 기록이 예수 나라를 가장 또렷하게, 자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나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신세계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개념으로 다시 정리했습니다. 그
    개념이 기독교입니다. 교회입니다. 바울을 건너 띄고 예수를 배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비한 경험이나 특별한 계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바울의 고백에 자기의 고백을 비추어 보는 검증(?)의 단계를 가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내가
    경험하는 예수가 꼭 같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설명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고, 일방적이고 강제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처음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만난 직후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아직 나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애벌레, 번데기, 성충의 시기를 거치는 완전탈바꿈의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사울을
    빚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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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울을 보며 겸손과 감사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알아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아는것도 이해하는것도 아니지만 알아진다는 말이 맞는듯 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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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께서는 오래참으시며 잠잠히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섭리를 방해하는 무지한 인간들의 교만과 아집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사울처럼 매맞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영의 귀와 눈을 열어 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한 매를 사전에 피하는 지혜스러운 자가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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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바울처럼 극심한 체험은 없었으나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 했을때 조용한 안식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변화된 삶을 살아야하는데 너무나 부족합니다. 나의 삶이 예수님의 향기가되어 이웃에 풍기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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