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장 1-18절: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의 열매

해설: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1절)에게 전해집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 되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사건을 커다란 스캔들로 간주하고 베드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할례를 받은 사람들”(2절) 즉 유대적인 전통에 매어 있던 사람들이 시비를 겁니다(3절). 베드로는 차분히 자초지종을 전합니다(4-17절).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마지막 절 즉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17절)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렇기에 모든 전통과 관습과 교리를 내려 놓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2의 오순절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보고를 듣고 모두 감동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묵상: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과 인습과 편견을 벗어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피부를 벗겨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또한 주변에서의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자주 피를 불러 옵니다. 인간의 죄 된 본성은 전통과 인습과 편견 안에 그대로 머물러 사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일으킨 변혁의 바람은 배타적 선민의식에 물들어 있던 유대인 사도들과 신도들로부터 만만치 않은 저항을 불러 옵니다. 

베드로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면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이니 이방인이 세례를 받으려면 먼저 개종 세례와 할례를 통해 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베드로 자신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방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세례를 베풀었는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자신을 통해 성령께서 하신 일들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교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갈 수 있는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합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말은 눈 질끈 감고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은 더 섬세하게 이웃을 배려하고 인내와 친절로 대합니다. 그렇게 하여 공동체를 세웁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을 통해 맺는 열매입니다(갈 5:22-23). 베드로는 성령의 은사만이 아니라 열매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5 responses to “사도행전 11장 1-18절: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의 열매”

  1. 속되고 부정한 존재를 십자가의 그 엄청난 은혜로 깨끗하다고 인정하시는 구원의
    하나님께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피부 색갈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종족도
    다 끝없이 넓은 주님의 사랑안에 있다는것을 항상기억하고 성령충만하여 가정에서
    부터 교회로 또 교회에서부터 성도들과 함께 사회와 땅 끝까지가서 구원의 주님을
    소개하는 교회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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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성령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그분의 마음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에 성령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감사하며, 그 선물을 나누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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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한 일들이 예루살렘의 신도들에게 전해집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부정한 이방인들에게 베드로가 세례를 주었다는
    소식이 퍽이나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신도들은 세례를 준 일을 언급하지 않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같이 식사를 했다는
    일부터 따집니다. 예수님 때도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마가 2:16) 보고 흠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것이 더 큰 사건인데, 고넬료 집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에 성령이 내렸다는 사실이 더 큰 뉴스인데 이방인과 상종을
    했다고, 말을 섞고 밥을 먹었다는 사실부터 시비를 겁니다. 본론보다 가십에 더 혹하는 것이 우리의 맹점인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신도들의 태도가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하고 스데반과 빌립
    같은 사도들을 낸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다소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베드로가 질서정연하게 설명을 하자 그들은 할 말이 없어졌다고
    저자는 기록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에 뿌리를 둔 단체가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변화 되었습니다. 다양성 diversity 이 정통성 authenticity 이나 동일성
    homogeneity 같은 키워드를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변화는 진행형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애즈베리 대학의 성령 운동을 말 할
    때 “The Spirit is on the move” 라고들 합니다. 성령은 움직이는 것, 변화의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 네 복음서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 세대와 다음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스토리를 너머 성령의 시대로 기록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를 두 번 기록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다시 정리해 발표함으로써 독자인 우리는 두 번 읽습니다. 반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이겠지요. 고넬료도 베드로도 변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도 변화했습니다. 이방인도 변화했습니다.
    오늘 내게 주신 새 시간을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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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인 하나님을 피조물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항의할 수 있나요?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구원 받게하라는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 있습니까? 나의 편향적 사고와 교만과 아집을 십자가앞에 내려놓고 성령님이 이끄시는대로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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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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