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장 1-15절: 꺾이지 않는 마음

해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나 마게도니아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로 갑니다(1절). 늘 하던 대로 그들은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그 곳에 있던 사람들과 토론을 합니다(2절). 바울은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로 나아가는 방법을 고수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증명한 다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 합니다(3절). 그 결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4절).

하지만 데살로니가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유대인들 중에 그들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끌어 들여 야손의 집을 습격합니다. 야손은 빌립보의 루디아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의 거처를 마련해준 사람입니다(5절). 다행히 신도들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바울과 실라를 숨겨 두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그들은 야손과 신도들을 관원에게 데리고 가서 거짓 증언으로 고발합니다(6-7절).  관원들은 잠시 동요했으나 곧 보석금을 받고 야손과 신도들을 풀어줍니다(8-9절). 

신도들은 그날 밤에 바울과 실라를 데살로니가에서 7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베뢰아로 보냅니다. 그 곳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말씀을 전합니다(10절).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적지 않았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1-12절). 하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로 원정을 와서 소동을 벌였고,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그곳에 남겨 두고 아테네로 떠납니다(13-15절).

묵상:

지난 해 월드컵 경기 이후에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었습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첫 경기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꺾이지 않았기에 다음의 두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기를 읽으면서 그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봅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거듭 박해를 당하면서도 새 도시에 가면 언제나 유대인들을 먼저 찾아갑니다. 한 도시에서 전도의 결실을 많이 거두는 만큼 박해도 심해집니다.  그는 평화롭게 한 도시에서의 전도를 마무리 하고 떠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살해의 위협을 피해 다음 도시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꺾이지 않게 만든 힘은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에서 나왔고 그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악한 영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한 영혼이 온 우주보다 귀하므로 한 영혼을 건져내는 것은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과 미움과 박해를 당해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꺾이는 것 아닙니까? 너무도 쉽게 차가워졌다 더워졌다 하는 것 아닙니까? 

4 responses to “사도행전 17장 1-15절: 꺾이지 않는 마음”

  1. 비를 내리지않는 구름같은 믿음입니다. 말과 마음은 앞서가는데 손과 발이 따르지못하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선포하지 않으면 살수없는 갈망을 원합니다. 위협과
    칼이 닥처 와도 주님의 은혜를 세상에 알리는 결단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이 최고의 축복인것을 깨닫고 걸어가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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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복음 전파를 훼방하는 사탄의 방해는 예기치 않는 시간에 일어납니다. 사탄은 비어있는 지옥을 채우기위해 언제든지 공격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생의 순례길에서도 고난과 고통은 언제든 발생합니다. 주님!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이루어드리는 일을 막힘없이 실행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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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바울의 선교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훼방과 위협도 높아져 갑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3주에 걸쳐 토론을 했습니다 (2절). 습관대로 회당을 찾아 들어간 바울처럼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도 습관을 따라 믿음을
    따르고 보존하며 살았습니다. 습관이 꼭 구태의연한 것은 아닙니다. 습관대로 행동하는 것을 비난부터 한다면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토론을 하고 나서 여러 유대인과 그리스인들 또 귀부인들을 얻었습니다.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잡지
    못하자 대신 호스트인 야손을 붙잡아 관청으로 넘깁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의 회당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믿게 되었고 앞의 도시에서 처럼 그리스인과 귀부인들도 복음을 받아 들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고상하고 열정적이어서 바울의 말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들이 또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습관적으로 시작한 일에서 새로운 패턴이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처음부터 습관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행동이 그 위에 세워집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일은 전혀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일이기 보다 습관대로 가던
    길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일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어제는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서 만드는 뉴스레터
    <두루알리미>에 시카고의 현혜원 목사님이 쓴 “마리아와 마르다는 동일 인물인가?” 라는 글이 어제 날짜로 실렸습니다.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손님 접대로 혼자 바쁜 마르다 자매, 또 나사로의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다이아나
    버틀러 배스 Diana Butler Bass 라는 교수의 글을 2년 정도 이메일로 받아 읽고 있습니다. 그분이 작년 7월에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안내를 했습니다. 그 글이 얼마나 놀랍던지요. 마침 가게에 들린 교회 소그룹 친구에게 배스 교수의 글을 압축
    설명해 주었는데 8개월 뒤인 어제 <두루알리미>에 현혜원 목사님의 글로 세상에 전해진 것입니다. ‘반석 베드로와 타워 (탑) 마리아’
    의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어제 일어난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저녁에 있었던 세미나였습니다. 어바인에 있는 살림교회가 준비한
    “생태위기에 대한 신학적 성찰” 세미나였는데 한국의 구미정 교수를 강사로 모시고 줌에서 같이 만났습니다. 인간위주의 신학(창
    1:28)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려 보려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무조건 믿는다는 것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보다 훨씬 진보된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에 어울리는 새 습관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도시로 발걸음을 옮기는 바울 사도를 따라 나도 같이
    떠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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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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