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장 1-16절: 피할 고난, 대면할 고난

해설: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한 후에 바울과 그 일행은 지중해 북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결국 두로(팔레스타인 위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 항구 도시)에 도착합니다(1-3절).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일 주일 동안 지냈는데, 성령께서는 두로의 신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당할 일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반대합니다(4절).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계획을 강행합니다. 바울 일행이 떠나는 날 두로의 신도들은 항구에 배웅 나와 간절히 기도한 후에 바울 일행을 떠나 보냅니다(5-6절).

일행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이르러 빌립의 집에 머뭅니다(7-9절). 빌립은 사마리아에 전도하러 갔던 그 사람입니다(8:4-40). 그 때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바울 사도에게 닥칠 일을 예언합니다(10-11절). 그는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했던 사람입니다(11:28). 이 예언을 듣고 가이사랴의 신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 행을 포기하라고 간곡하게 권유합니다(12절). 하지만 바울 사도는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13절). 그들은 할 수 없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14절)라고 기도하고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지낸 후에 바울 사도는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그 때 키프로스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갔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무르기 위함이었습니다(15-16절).

묵상:

에베소 장로들에게 설교하면서 바울 사도는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20:23-24)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가 두로에 머무는 동안에 그곳 신도들도 성령의 계시를 통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알고 그의 길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아가보의 예언을 들었을 때에도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미리 알려 주신 이유가 그곳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점쟁이는 미래에 일어날 어려움을 미리 알아 피할 묘수를 찾아 줍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미래에 당할 수 있는 어려움을 알려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각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위해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점쟁이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안위와 복락이 목적이지만,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복락을 포기합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4 responses to “사도행전 21장 1-16절: 피할 고난, 대면할 고난”

  1. 바울을 통하여 같은 성령의 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참 믿음 인지를 배웁니다, 어떤 어려움이 예상될 때 이를 어떻게 피할까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어려움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고 받아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따르는 믿음으로 인내할수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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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 오신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세상의 모든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바울과 같은 우직한 믿음의
    선배를 보여주시는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비겁하고 초라한 존재에게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십자가 은혜와 부활을 담대히 전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알리며 부활의 증언을 하는 대변인
    들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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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참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정답이 있는 듯하지만 정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하지만 그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매일 진리 앞에 내 삶을 드러내며 기도하는 것. 믿음의 길은 단순하지만, 매번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의 경계선에서 선택을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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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 해설의 제목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피할 고난과 대면할 고난이 각각이 아니라 하나인 듯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앞에 나타난 고난을
    피한다고 해도 없어지는게 아니라 잠시 미루는 것 뿐, 또 마주하게 될 때가 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한인교회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줌 미팅이 있었습니다. 동성애 이슈를 중심으로 교단에 남는 교회와 떠나는 교회가 점점 선명하게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하며 만나는 고난 특히 예루살렘에 가서 맞닥뜨리게 될 고난을 지금 우리 교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동일한 선에 놓을 수는
    없지만 고난의 ‘때’에 대해 묵상하면 서로 같이 가는 부분이 있음을 봅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여 회개와 고백의 일들이 일어나면서
    예루살렘 공동체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방인 신도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놓고 공동체는 흔들렸습니다. 그 때도
    전통 수호자와 진보 선호자가 맞섰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모두
    질 수 없었던 짐 (10절)”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모세의 율법 조항들의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야고보가 지혜로운 중재안을 내어 예루살렘
    공동체는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베드로와 바울은 각각의 자리에서 활발하게 사역합니다. 저자 누가는 바울에 집중하면서
    그의 행적을 전합니다. 인간의 성과 정체성 이슈는 긴 시간 동안 논의가 되어 왔습니다. 사회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기 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개인의 취향 정도로 여겨지다 80년대에 에이즈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 개인의 영역에 가둬 둘 수 없는
    이슈가 되었습니다. 교단 내에서도 더 이상 끌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4년 총회를 여러 번 지나면서 용케 잘 넘어간 안건, 미뤄진
    안건, 즉 ‘피한’ 고난이었습니다. 팬데믹을 만나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충돌이 예상되더라도 대면해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고난에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난을 마주할 힘을 기르라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일 것입니다. 고난에 때가 없다면
    우리는 원시인 상태에 그쳤을 것입니다. 싸우거나 도망가기 fight or flight 본능에만 의지하는 삶은 말 그대로 옛 사람의
    삶입니다. 고난에 타이밍이 있기에 야고보의 중재안도 나오고, 바울은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의 때로 인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한 종교 지도자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입니다.
    피한다고 피해질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여시는 주님의 방법이 때론 고난의 얼굴로 우리를 만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옛 사람으로 남기도 싫습니다. 생동하는 모든 것은 아픔이라는 껍질에서 나왔다는 진실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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