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할렐시편’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 사용했던 예전(liturgy)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113편부터 118편까지의 할렐시편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유월절 식사 동안에 암송하며 불려졌습니다.
1-4절과 29절은 이 시편을 감싸고 있습니다. 처음과 끝에서 시인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로써 이 시편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5절부터 14절까지에서 시인은 그렇게 고백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 나라가 그를 에워싸고 “가시덤불에 붙은 불처럼”(12절) 그를 삼키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원수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 계심을 확인했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 두려울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6절). 또한 그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8-9절).
“의인의 장막”(15절)은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리며 “주님의 오른손이 힘차시다”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을 의인화 하여 표현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문들”(19절)은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의 성문을 비유로 사용한 것입니다. 성문이 열려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그분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과 같은 신세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집 모퉁이의 머릿돌”(22절)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적으로는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23절). 그러니 주님의 날에 그분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24절). 이 고백에 근거하여 시인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축복하며(25-26절)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권면합니다(27-28절). 그분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9절).
묵상:
이 시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 세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22절로서, 예수께서 ‘포도원과 소작인의 비유'(마 21:33-46)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세상의 수 많은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제사장의 나라로 만드신 것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으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의 사명에 끝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마 21:43)을 새로운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새로운 선민은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교회는 새로운 선민으로 선택받은 “새로운 민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혈통으로 형성된 민족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민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맺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민족의 한 백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24절입니다. “이 날”은 예배로 모이는 날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과 축제일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을 의미합니다. 예배에서 우리가 할 일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일주일 내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매일이 “이 날”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매일 아침 24절을 암송 하며 감사하게 하루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25절과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하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25절에서 왔고,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26절에서 왔습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이 이 시편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읽었다는 뜻입니다. 믿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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