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61절부터 168절은 매 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 ‘쉰’으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등지고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을 가리켜 “권력자”(161절)라고 부릅니다. 권력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점점 작아지고 악행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의로운 사람은 눈엣가시와 같습니다. 그래서 의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권력자보다 더 강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법을 따라 살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162-164절, 166-168절). 그렇게 철저하게 의지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165절).
169절부터 176절까지는 마지막 알파벳 ‘타우’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마지막 연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그의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것이고(169절), 다른 하나는 악인들의 위협에서 자신을 건져 달라는 것입니다(170절). 그는 주님의 법도를 따르기로 선택했으며, 그것을 노래하고 찬양합니다. 그는 모든 소망을 주님께 걸었습니다(171-175절). 하지만 그는 길을 잃은 양처럼 되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그 상태로 내버려 두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176절).
시인이 이 긴 시편을 ‘열린 결말’(open ending)으로 끝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자주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의 현실 중에 있을 때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기다리지만, 응답은 자주 늦어지고 기다림은 길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마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희망을 걸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것은 이 땅에서 잘 되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고난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그 길을 걷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희망을 걸고 고난을 견디다 보면 때로 주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 손길을 한번만 경험해도 그동안 겪은 모든 고난이 보상 되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고난을 대면해도 견딜 능력을 얻습니다.
묵상:
영성가들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돈, 권력 그리고 섹스를 꼽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절제력을 잃고 이 욕망들에 휘둘리는 데 있습니다. 칼이 병을 치료하는 유익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욕망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파괴시키며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권력에 대한 의지와 욕망이 있습니다.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었다면, 그 추진력은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절제력을 잃으면 권력은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크든 작든 권력에 취하면 하나님을 업신 여기게 되고 악행에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흉하게 표출될 경우 ‘갑질’이라고 부릅니다. 약자에게도 권력에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흉하게 표출되는 것을 ‘을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매일의 기도는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저는 왕이 아닙니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오셔서 저의 왕이 되어 주시고 저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고개 숙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에의 욕구에 사로잡히는 불상사를 막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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