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세 번째 순례자의 노래는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입니다. 순례자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례길을 떠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설렜다(1절)고 말하고, 또한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2절)고 고백합니다. 몸은 아직 멀리 있지만 마음은 이미 예루살렘 성문 안에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찬양합니다. 그 도시는 거룩한 도시 답게 물리적으로도 흠이 없습니다(3절).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라”(4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수장절(초막절/장막절)은 순례 축제로서 예루살렘 바깥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이어서(6-9절) 시인은 예루살렘을 위해 축복합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평화”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합니다(6절 2회, 7절 2회, 8절).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전쟁이 그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삶의 모든 조건이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 다른 민족에게 제사장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선택 받은 도시로서 모든 세상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위해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평화가 그 도성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그럴 때 그 평화가 이 세상을 흘러나갈 것입니다.
묵상: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은 아이러니 하게도 ‘불화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성전터를 점령한 요르단 군인들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투적 유대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은 이 세상 도시 가운데 가장 행동과 출입이 불편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시인이 호소한 것처럼 그 도성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도시에 평화를 회복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그 땅을 무슬림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슬림은 유대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해법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지금의 상태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 불안한 평화가 지속가능한 평화로 바뀌는 것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가능합니다. 그것이 사도 요한이 환상을 통해 보았던 새 예루살렘(계 21:9-27)의 비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그 안에 새 예루살렘이 임할 때 진정한 평화는 자리 잡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잠정적인 평화일 뿐이고 항구적인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프레데릭 웨덜리(Frederic Weatherly)가 작사하고 마이클 메이브릭(Micheal Maybrick)이 곡을 써 만든 ‘거룩한 성’이라는 찬송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비록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 거룩한 성이 언젠가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 성에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계 21:27)은 그 거룩한 성에서 함께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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