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네 번째 순례자의 노래에서 시인은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보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1절)이라는 표현에서 강조점은 “멀리 계시다”는 데 있지 않고 “가장 높은 곳에서 다스리신다”에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순례길에 오른 이유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아직 순례길에 있으나 마음으로는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1절).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신의 마음을 주인의 손길을 “살피는”(2절) 종의 심정에 비유합니다. 노예 제도 하에서 종의 운명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기에 종은 주인의 손을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종은 주인의 손을 살피면서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고대합니다. 그것처럼 시인은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과 함께(1절의 주어 “나”가 2절에서는 “우리”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원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우러러 봅니다”(2절)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3절)라고 반복하여 간구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끼리에 엘레이손”(주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이라는 기도문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너무나도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3절). “평안하게 사는 자들”과 “오만한 자들”(4절)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살면서 때로 조롱과 멸시를 당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이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깥에서 힘 센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아이처럼, 시인은 이방 땅에 살면서 당한 설움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묵상:
믿는 사람은 모두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방땅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절대 다수가 따르는 삶의 원칙을 거부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원칙을 따릅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우리는 절대 다수가 추구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세상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용인합니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벗어나면 그 다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때로 조롱과 멸시를 감수해야 합니다. 손해와 박해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평안하게 사는”(4절)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분은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1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됩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조롱과 멸시와 박해를 감수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땅에서 때로는 조롱과 멸시, 때로는 손해와 박해를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분통하고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1절).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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