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여덟 번째 순례자의 노래에서 시인은 하나님에게 철저히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묘사합니다. “집”(1절)은 적어도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둘째는 인간이 사는 집을, 그리고 셋째는 가정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혹은 인류가 이루는 업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집을 세우고 그 집을 지키기 위해 노력 합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어 버립니다(1절).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2절)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나,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2절)는 개역개정처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것이며, 인간이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일은 일어납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녀의 축복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3절)이라는 말은 자손을 잇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자녀가 저절로 생기는 것 같지만, 그것도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당시에는 자녀들을 많이 두는 것이 곧 그 사람의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녀를 화살에 비유합니다. 고대에 “성문”(5절)은 재판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묵상:
죄 중에 가장 큰 죄, 착각 중에 가장 큰 착각은 “하나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교만의 핵심이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번영할 때면 그런 착각이 들기 쉽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 문명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우리 자신의 능력 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점점 세를 키우고 있는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비드-19 팬데믹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과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삼 년 동안의 코비드 팬데믹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은 언제든지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행히 신속한 백신 개발로 인해 삼 년 만에 팬데믹에서 벗어났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으로 기후 변화, 혜성과의 충돌, AI 로봇, 핵전쟁 등을 말하지만,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미생물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도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운행과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일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울며 뿌린 씨앗의 열매를 손에 넣을 수 있고,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깊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따라 사는 삶처럼 자유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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