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7편: 전능자의 손길 아래

해설:

여덟 번째 순례자의 노래에서 시인은 하나님에게 철저히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묘사합니다. “집”(1절)은 적어도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을, 둘째는 인간이 사는 집을, 그리고 셋째는 가정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혹은 인류가 이루는 업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집을 세우고 그 집을 지키기 위해 노력 합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어 버립니다(1절).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2절)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나,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2절)는 개역개정처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의미는 동일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것이며, 인간이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일은 일어납니다. 

이어서 시인은 자녀의 축복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3절)이라는 말은 자손을 잇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자녀가 저절로 생기는 것 같지만, 그것도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당시에는 자녀들을 많이 두는 것이 곧 그 사람의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녀를 화살에 비유합니다. 고대에 “성문”(5절)은 재판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묵상:

죄 중에 가장 큰 죄, 착각 중에 가장 큰 착각은 “하나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교만의 핵심이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잠 16:18)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번영할 때면 그런 착각이 들기 쉽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 문명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우리 자신의 능력 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점점 세를 키우고 있는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비드-19 팬데믹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과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삼 년 동안의 코비드 팬데믹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은 언제든지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행히 신속한 백신 개발로 인해 삼 년 만에 팬데믹에서 벗어났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것으로 기후 변화, 혜성과의 충돌, AI 로봇, 핵전쟁 등을 말하지만,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미생물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도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운행과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일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울며 뿌린 씨앗의 열매를 손에 넣을 수 있고,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깊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따라 사는 삶처럼 자유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4 responses to “시편 127편: 전능자의 손길 아래”

  1. Homo Deus의 생각을 가진 세상에서 인류가 아웅다웅 하며 살고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천지 창조주 성삼위 임마누엘 하나님 없이는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가 바로
    설수 없는것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의지하는 세상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사는 삶을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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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350연대 페스트로 인해 유라시아 인구의 1/3이 사망하고 일차대전 때인 1918년에도 스페인 독감으로 1억 이상의 인구가 사망했으며 천연두에 의한 미국 인디안의 멸종, 막 지나간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수가 1500만명이 넘어가는 사건들이 어찌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으로 감당을 할수있겠습니까 하나님!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삶속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주권을 받아들입니다, 단 잠에서 깨어난 이 아침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내가 세우는 집이 헛된 수고가 되지 않고 주님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돌봐주시며 감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만 의지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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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절)”라고 번역된 구절을 외우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 성경을 읽고 좋은 말씀을 공책에 적어가며 외우던 때에 가장 많이 좋아했던 시편입니다. ‘파숫군의 경성함’이라는 표현 덕분에 기억이 더 잘 살아납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5절)’ 라는 구절은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 차 있는 사람’ 이라는 새번역보다 긴박성이 더 잘 느껴집니다. 화살통에 있는 화살보다 수중의 화살이 1초라도 더 빠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좋아하던 당시에는 겸손의 중요성보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삶의 허무함을 더 많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도 (자기 집을 짓는 나이가 되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짓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한다는 뜻으로 받았습니다. 제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먼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으면서는 집보다 화살에 마음이 쓰입니다. 왜 집이고, 왜 화살일까…집을 짓는 일은 방어와 보호가 목적일테고, 화살을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여차하면 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냥이 필요할 때 화살이 있어야 할테니 공격과 수비에 다 쓰입니다. 인생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집을 짓는 일, 집을 지키는 일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구절도 영원한 잠, 영원한 안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처럼 한 시편을 나이에 따라 같은 다르게 읽으며 다른 감동을 받는 것이 신기하며 또 감사하기도 합니다. 자녀가 꼭 화살이라고, 나아가 자식이 많아야 화살이 가득한 것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일, 사람, 사건…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기억하라는 권면으로 받아 들입니다. 내가 읽는 성경은 127편의 작은 제목을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라고 달았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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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시 23:6) 주님! 시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되어 진실하게, 거룩하게, 정의롭게 살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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