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편: 깊은 물 속에서 

해설:

열한 번째 순례자의 노래는 라틴어 번역본을 따라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라는 제목으로 널리 사랑 받아 온 참회 시편입니다. 우리 찬송가 363장(“내가 깊은 곳에서”)의 가사도 이 시편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인은 “깊은 물 속에서”(1절) 이 기도를 올립니다. “깊은 물”은 시인이 처한 죽음의 깊은 계곡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원수들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혹은 심리적인 공황 상태로 인해 시인은 물속 깊은 곳에 빠진 듯한 상태에 있습니다. 물 속에 빠져 질식할 듯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구절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절망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망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청합니다(1-2절).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며 시인은 자신의 죄를 기억합니다. 죄로 인해 그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죽기 전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속속들이 죄로 물들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3절).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범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용서하실 분도 하나님 뿐이십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용서에 너그러우시고 빠르신 분입니다(4절).

그렇게 기도하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5절). 죽어도 하나님의 음성만 듣는다면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6절)합니다. 파수꾼은 밤새도록 성을 지키면서 추위와 피로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새벽이 가까워질 때 그들은 동이 트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권합니다(7-8절). “인자하심”(7절)은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입니다. ‘헤세드’는 헬라어 ‘아가페’처럼 조건 없고 변함 없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분은 회개하는 심령들을 “모든 죄에서 속량”(8절)하십니다. 그 은혜를 입기 위해 시인은 지금 성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인간성의 바닥에 이르면 결국 죄와 죽음만 남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국 인간의 모든 두려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이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잊고 살기 위해 방책을 궁리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한 두려움을  의식의 가장 깊은 바닥에 뭉개 두고 다른 것들로 마음과 생각을 채웁니다. 의롭고 거룩한 존재인 것처럼 가장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스스로를 속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교만과 오만의 원인이며, 그것이 우리의 헛된 몸부림의 이유입니다.

고난은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를 속여왔던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인생의 바닥에서 우리는 집요하게 외면하고 무시했던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마주합니다. 이 때, 부를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때, 의지할 대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이름이 허접한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십자가에서 영원한 사랑을 확인해 주신 그분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다함 없는 사랑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 responses to “시편 130편: 깊은 물 속에서 ”

  1. 악취가나는 죄로인해 죽어야 마땅한 가련한 존재이고 마땅히 멸망할 세상입니다.
    Memento Mori 를 항상 기억하고 동시에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사역을 최 우선으로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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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께서 인간을 속성을 지적하신다면 어느 누가 감히 주님 앞에서 머리를 들수 있겠습니까?
    죄와 허식으로 속속들이 물들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불편 한 진실을 고백하며 주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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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세상 재미에 빠져 하나님을 잘 모르고 살왔던 날들이 있었슴을 고백합니다. 담배, 술, 도박등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재미에 빠진 나를 그냥두시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통해 회개하게하시며 십자가의사랑으로 용서해주셨습니다.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남은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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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친구와 오랫만에 만났습니다. 서로 잘 있겠거니…생각하며 가끔 안부만 하고 지내다 몇 년 만에 반갑게 만났습니다. 만나는 약속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지리적으로 멀리 살기도 했고 둘 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우정이란게 꼭 만나야 지속되는 것이냐,
    진정한 친구라면 만나지 못하는 사정까지도 서로 이해한다는 것 아니냐 하는 전제가 단단히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나도 만나지
    못하고 살아도 우정은 변함이 없다고 여기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보다 복잡한 여러 결의 감정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적 활동이 왕성한 그가 부러우면서 짠하면서 서운했습니다. 서로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지난 세월동안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교훈들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채 떠밀리듯 살아왔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내가 미국에 살지
    않았다면, 친구가 평범한 아낙네로 살았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더 많이 ‘참견’하고 더 많이 아껴주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며칠 전부터 내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야 했던 그가
    나보다 더 친구가 필요했는데 내가 그걸 못해주었구나 하는 미안함을 느끼자 복잡하던 마음이 되려 단순해지며 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가 없어서 허전했던 나만 보다가 내가 없어서 허전했던 친구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가운데 계시니 서로 못 보고 살아도
    괜찮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와 만나 함께 한 시간은 여전히 너무도 짧았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부모는 우리가 선택하지 못해도
    친구는 선택해서 친구가 된다고 하는데 그 친구도 나도 ‘선택보다 섭리!’ 라고 동시에 말했습니다. 친구로 만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각자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이 우정에 대한 예의이고 증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풀꽃”이라는 제목에 맞게 자세히 오래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 곱지 않은 풀꽃이 없는데, 우리는 너무 바빠 그런 공을
    들이지지 않습니다. 친구는 자세히 볼 시간이 없어도, 오래 보고 있지 않아도 사랑스럽습니다. 우정의 힘입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은
    소망을 여호와께 두라고 합니다. 변함 없는 그분의 사랑에 의지해 살라고 권합니다. 우리에게 친구를 허락하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우정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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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리 인생은 짧고도 짧습니다. 그런 인생에 길잡이와 같은 주님이 없다면 얼마나 두렵고 무의미할지. 죽음에 이르면 돈, 명예, 인간관계, 세상의 모든것과는 이별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내 마음속 깊은 두려움을 이기도록, 또 내가 가진 소유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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