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열두 번째 순례자의 노래는 가장 짧은 시편 중 하나이지만 가장 심오한 시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맡긴 사람의 내면 상태와 삶의 자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 내가 …… 하였습니다”(1절)라는 말은 “과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어 살아갑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만한 길”을 갑니다. 그 마음은 만족을 알지 못하고 분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을 이루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분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이후를 말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이르면 분수에 넘치는 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크고 높고 비싼 것을 좋아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런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가장 크고 높고 좋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젖뗀 아이”(2절)와 같습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 어머니와의 친밀함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참되게 얻은 사람에게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백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 하면서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3절)고 권합니다.
묵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단일신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삼위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사귐”(코이노니아)이라고 부릅니다(요일 1:3). 사귐은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친밀해지는 인격적 소통을 가리킵니다. 인격적 사귐은 서로를 닮아가게 하고 이심전심으로 통하게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나누는 사귐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가 “어머니 품에 안긴 젖뗀 아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의 가장 강한 열망은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품을 생각하고 그 사랑에 머물러 쉬는 일입니다. 우리의 예배, 기도, 말씀 묵상 그리고 찬양은 그분의 품 안에서 친밀함을 누리려는 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안식과 만족을 얻고 나면 우리가 몸부림쳐 찾던 것이 온전히 채워졌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고 성취하여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손에 쥐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회적으로 이룬 것이 많아질수록, 내적 공허감은 더 커지고 진해집니다. 다윗은 이 진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만족을 얻고 나서의 일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의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도 헛된 몸부림을 멈추고 먼저 하나님 안에서 만족과 안식을 얻고 누리라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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