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기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개인의 탄원시에 속합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는 기도를 올립니다(1-7절). 그는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1절)이지만 “신실”(2절, 개역개정 “경건”)하다고 고백합니다. 현실 사회에서 신실하게 사는 사람은 자주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가난한 자”는 “경건한 자”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종”(2절, 4절)이라고 부릅니다. 16절에서는 “여종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로써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이유는 “주님은 선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5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그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주님께 부르짖습니다(6-7절).

그런 다음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고백합니다(8-13절). 주님은 신들 중에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8절).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9절).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10절). 시인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온전히 따르기를 소원합니다(11절).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고 싶기 때문입니다(12절). 주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스올(무덤 혹은 지옥을 의미하는 말로서 시인이 처한 절망의 구덩이에 대한 비유)에 빠진 자신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를 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13절).  

이 고백에 근거하여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 그는 지금 오만한 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습니다(14절). 시편에서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15절)입니다. 오만한 자들이 세력을 떨치는 현실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신실하게 살기를 다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부르짖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은총의 표적”(개역개정 17절)을 보여 주셔서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부끄러워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6-17절).

묵상:

시인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실하게 살아 왔다고 고백하고(2절) 앞으로도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11절). 하지만 인간의 신실함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자격을 부여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어떤 공적을 쌓아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요구할 권리를 인정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간구하는 중간 중간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고백을 끼어 넣습니다(5절, 13절, 15절).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시다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기댈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 우리가 기댈 다른 언덕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안중에 둔”(14절) 사람으로서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분의 뜻을 배우고 행하기에 더욱 돈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그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면,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성품이 변하고 삶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이유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 개역개정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 성에 물든 자연인으로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은혜는 불완전하고 조건적입니다. 우리는 자비롭지 못하고 은혜에 인색하며 노하기에 민첩하고 사랑과 진실이 메마른 사람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육신 안에 살고 있는 한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는 없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일신 우일신’ 그분의 성품 안에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5 responses to “시편 86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1.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주님 앞에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신실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고 주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도록 격려해 주십시요.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주님을 뵈올 그 날까지 멈추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Like

  2.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 없으신 분이십니다(15절). 주님의 성품에 나의 성품을 오버랩시켜 봅니다. 그러나 어느하나 부합되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성품을 나에게도 나눠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Like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은혜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시인의 고백이 내 삶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더 알기를 소망하는 하루입니다.

    Like

  4. 크리스찬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다 다르지만 또 다 같습니다. 어느 두 사람이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듯 쌍둥이 형제라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구별됨과 자주 마주칩니다. 성별된 백성, 성별된 삶이라는 주제는 구약성서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우리는 성별됨 set apart의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게를 시작하면서 다짐한 것은, ‘한국인 보스는 지독하다’와 ‘크리스찬이 더 하다’라는 소리는 듣지 않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긍정문, 예를 들어 ‘한국 사람 보스는 최고다’ 라든가, ‘크리스찬이라 역시 좋다’ 같은 좋은 소리를 듣게끔 잘 하겠다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 데 두어도 어디로 가지 않지만, (인격의) 바닥이 어딘지 단단히 보고 조심하는 일은 잘 보이는 데 두어야겠다는 무의식적인 결정입니다. 두가지 표지 – 한국인과 크리스찬 – 중에서 한국인 부분은 겉으로 보이고 (생김새와 언어) 크리스찬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가난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구별된 모습으로 살겠다는 결단과 노력은 이웃과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의 이웃사람들이 증인이고, 이웃에게 신실한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하나님이 증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 사이에서 하신 말과 일을 보아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을 보고 사람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이치는 역설적이고 신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자나, 안 가진 자나 하나님/창조자/신/우주/신비 앞에서 다 한 톨의 먼지로 살다 갑니다. 예수의 구원은 나의 결단이나 이행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는 나의 죄는 물론이요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신 분입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될까요? 아니면, 그러니 꼭 뭔가를 해야 할까요?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주소서. 내가 주의 진리를 따라 걷겠습니다. 나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주소서. 내가 주의 이름을 높이고 존경하겠습니다 (11절)” 이 구절을 우리 시대의 시와 찬양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주님 앞에서 주의 길을 묻고, 주의 진리를 묵상하는 오늘 아침 이 자리의 기도가 이웃과의 사귐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이 나를 모르신다고 할까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내가 스쳐 지나간 많은 이들이 나를 모른다고 할테니 걱정입니다. 주여…

    Like

  5.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 이심을 고백합니다, 그외의 신들은 잡 신들 입니다. 영혼이 가난하고 궁핍 하기를 원합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든 세상에 살지만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임마누엘 주님을 깨닫고 꼭 붙잡고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믿음의 자매와 가족에게 주님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아멘.

    Like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Blog at WordPress.com.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