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기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개인의 탄원시에 속합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는 기도를 올립니다(1-7절). 그는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1절)이지만 “신실”(2절, 개역개정 “경건”)하다고 고백합니다. 현실 사회에서 신실하게 사는 사람은 자주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가난한 자”는 “경건한 자”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종”(2절, 4절)이라고 부릅니다. 16절에서는 “여종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로써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이유는 “주님은 선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5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그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주님께 부르짖습니다(6-7절).
그런 다음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고백합니다(8-13절). 주님은 신들 중에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8절).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9절).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10절). 시인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온전히 따르기를 소원합니다(11절).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고 싶기 때문입니다(12절). 주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스올(무덤 혹은 지옥을 의미하는 말로서 시인이 처한 절망의 구덩이에 대한 비유)에 빠진 자신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를 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13절).
이 고백에 근거하여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 그는 지금 오만한 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습니다(14절). 시편에서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15절)입니다. 오만한 자들이 세력을 떨치는 현실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신실하게 살기를 다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부르짖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은총의 표적”(개역개정 17절)을 보여 주셔서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부끄러워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6-17절).
묵상:
시인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실하게 살아 왔다고 고백하고(2절) 앞으로도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11절). 하지만 인간의 신실함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자격을 부여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어떤 공적을 쌓아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요구할 권리를 인정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간구하는 중간 중간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고백을 끼어 넣습니다(5절, 13절, 15절).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시다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기댈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 우리가 기댈 다른 언덕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안중에 둔”(14절) 사람으로서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분의 뜻을 배우고 행하기에 더욱 돈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그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면,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성품이 변하고 삶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이유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 개역개정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 성에 물든 자연인으로서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은혜는 불완전하고 조건적입니다. 우리는 자비롭지 못하고 은혜에 인색하며 노하기에 민첩하고 사랑과 진실이 메마른 사람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육신 안에 살고 있는 한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는 없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일신 우일신’ 그분의 성품 안에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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