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에는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안식일 예배에서 불려진 찬송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나오고(1-5절), 악인들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고(6-11절), 의인들에 대한 칭송으로 마칩니다(12-15절).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고백합니다. 그는 그분의 사랑과 성실하심에 대해 말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안식일만이 아니라 매일 그렇게 합니다(1-2절).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을 부릅니다(3-4절). 진정한 예배는 이렇듯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로 인한 기쁨의 응답입니다. 예배 드리는 것 자체가 더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에 대해 고백합니다(5절).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6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자연히 죄악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 심판 받을 것입니다(7절). 주님은 영원히 높임 받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8절). 시인은 악한 자들이 결국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9절). 주님께서 의로운 사람을 돌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10-11절).
악인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고백한 다음, 시인은 의인에 대해 말을 잇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12절)은 당시에 가장 좋은 목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또한 믿는 사람들을 “주님의 집” 곧 “하나님의 뜰”(13절)에 심겨진 종려 나무에 비유합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14절)라는 말씀은 믿는 사람 안에 흐르는,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올곧으심”(15절)이 온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묵상:
우리의 예배는 대개 인간적인 동기에서 나옵니다.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를 찾습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당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동기로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의미의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 예배를 찾습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인간적인 동기로 인해 예배의 자리를 찾은 사람은 그 필요가 채워지면 예배의 자리를 다시 떠납니다.
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기에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즐깁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 설 때 혹은 경이로운 연주를 감상할 때 우리는 저절로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마음으로 느끼고 터져 나오는 응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노동이 아니라 율동입니다. 예식이 아니라 놀이입니다. 예배 자체가 즐거움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면 예배자는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혹은 하나님의 정원에 심긴 나무처럼 영적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육신적으로는 병 들고 노쇠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늘 살아 있습니다. 예배자들을 “들소처럼 강하게”만들고 “신선한 기름을 부어 새롭게”(10절) 해줍니다. 참된 예배에는 이토록 놀라운 이적이 있습니다. 그런 예배자에게는 사랑과 성실의 열매가 가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는 그런 예배자를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기에 터져 나오는 기쁨의 응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정원에 내 존재의 뿌리를 든든히 심는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그리고 우거진 종려나무처럼 늘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