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2편: 예배를 기뻐하다

해설:

이 시편에는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안식일 예배에서 불려진 찬송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나오고(1-5절), 악인들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고(6-11절), 의인들에 대한 칭송으로 마칩니다(12-15절).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고백합니다. 그는 그분의 사랑과 성실하심에 대해 말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안식일만이 아니라 매일 그렇게 합니다(1-2절).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을 부릅니다(3-4절). 진정한 예배는 이렇듯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로 인한 기쁨의 응답입니다. 예배 드리는 것 자체가 더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에 대해 고백합니다(5절).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6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자연히 죄악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 심판 받을 것입니다(7절). 주님은 영원히 높임 받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8절). 시인은 악한 자들이 결국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9절). 주님께서 의로운 사람을 돌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10-11절). 

악인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고백한 다음, 시인은 의인에 대해 말을 잇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12절)은 당시에 가장 좋은 목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또한 믿는 사람들을 “주님의 집” 곧 “하나님의 뜰”(13절)에 심겨진 종려 나무에 비유합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14절)라는 말씀은 믿는 사람 안에 흐르는,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올곧으심”(15절)이 온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묵상:

우리의 예배는 대개 인간적인 동기에서 나옵니다.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를 찾습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당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동기로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의미의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 예배를 찾습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인간적인 동기로 인해 예배의 자리를 찾은 사람은 그 필요가 채워지면 예배의 자리를 다시 떠납니다. 

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기에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즐깁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 설 때 혹은 경이로운 연주를 감상할 때 우리는 저절로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마음으로 느끼고 터져 나오는 응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노동이 아니라 율동입니다. 예식이 아니라 놀이입니다. 예배 자체가 즐거움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면 예배자는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혹은 하나님의 정원에 심긴 나무처럼 영적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육신적으로는 병 들고 노쇠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늘 살아 있습니다. 예배자들을 “들소처럼 강하게”만들고 “신선한 기름을 부어 새롭게”(10절) 해줍니다. 참된 예배에는 이토록 놀라운 이적이 있습니다. 그런 예배자에게는 사랑과 성실의 열매가 가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는 그런 예배자를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기에 터져 나오는 기쁨의 응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정원에 내 존재의 뿌리를 든든히 심는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그리고 우거진 종려나무처럼 늘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6 responses to “시편 92편: 예배를 기뻐하다”

  1. 성도들이 함께 주님의 날에 드리는 예배가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매일의 일상이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배를 통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홀로받으시고 신도들 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 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어렵고 죄악의 세상에서 살지만,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 하시며 상을 채리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가족들과 더불어 주님의 집에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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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마음을 다해 주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지난 날들에서 우둔하고 미련하여 주님의 위대하심과 영원하심을 미쳐 못 깨닫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릴없는 늙으이로 인생을 끝내지 않고 지금의 이 자리에서 삶의 진리를 파악하고 마지막 열매를 맺어나가는 삶으로 은총받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께 겸손하고 친절하게 다가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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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루를 마감하고 예배를 드릴때 때로는 피곤한 몸으로 드릴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귐으로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 받아 힘을 얻습니다. 오늘도 늙었지만 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린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항상 열매맺고 진액이 넘치고 푸르름을 간직한 나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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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예식자가 아닌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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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요즘처럼 잔뜩 긴장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연말 연시에는 예년보다 훨씬 자주, 많이 비가 왔습니다. 단비의 수준을 너머 안전이 걱정되는 폭우와 폭풍이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설 명절 잔치로 바쁜 동네에서 총기 살상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열 명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하는 비극입니다. 아시안 혐오 범죄 아닐까 다들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보니 범인 자신도 아시안이요 나이도 70대의 시니어였습니다. 뉴섬 주지사가 사고를 당한 유족들을 만나 위로하는데 보좌관이 다가와 또 다른 총격 사고가 북가주에서 일어났다고 전했답니다. 이틀 만에 또 대량 살상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번에도 또 아시안을 상대로 아시안이 저지른 사고였습니다. 이 사건 범인도 60대 중반의 아시안 남자입니다. 어느 신문에선 아시안 시니어 남성들의 우울증이 타인종보다 더 많고 심각하다는 기사도 실었습니다. 말이 별로 없고 묵묵히 속으로 삭이는 것을 ‘정상’으로 아는 아시안들, 가정의 소중함을 더욱 중히 여기고 체면을 유지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문화권에서 성장한 남성이라면 나이 들면서 일어나는 안팎의 여러 변화들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사람을 죽인다는 데까지 생각이 가고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와 악의는 어디에서 틀어진 ‘굽은’ 길일까 생각해 봅니다. 유가족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 새벽 2시엔 심한 지진에 잠이 깼습니다. 침대 밑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요 살림 기기가 흔들리며 소리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진원지가 바로 가까운 데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또 여진이 있을까봐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아! 죽는 것이 너무 쉬운 세상이다.” 평균 수명이 어떻고 노화 방지 의학이 얼마나 발전했고…등등을 자랑하지만 실제로 노쇠해서 육신의 기운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자연사’보다 돌연사나 사고사, 잘 알지도 못하는 병으로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읽으니 예배에 대한 생각이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예배에 대해서는 팬데믹으로 발이 묶여 교회에 나갈 수 없던 때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외에 다른 예배도 가능할까 생각하던 것이 일차적인 패러다임 쉬프트였다면, 예배를 드리는 나의 마음가짐, 주님께 올리는 나의 찬양의 겉과 속은 무엇일까 등등 세부적인 것을 다시 점검하는 것이 이차적인 쉬프트입니다. 이 두 가지 변화를 지나면서도 의무와 예식의 틀은 깨지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예배는 일이요 계획이지 잔치나 놀이의 즉흥성은 없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합니다. 답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해 애쓰면서 내가 겸손해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바라시는지 모릅니다. 주님과 함께 일하고 쉬고 걷고 먹는 것이 예배인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시는지 모릅니다. 주님, 두려움으로 맞이한 오늘이지만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싱싱하고 푸른 기운을 덧입게 해주세요.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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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렇게 융성했던 유럽의 천주교와 기독교가 지금은 과거에 화려했던 유적지처럼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합니다. 눈물과 감동과 부르짖음과 율동을 상상합니다. 어느순간 무감정으로 점잖게 살고있는 나를 돌아봅니다. 감동으로 가득차 두손들고 찬양하고 통곡하는 나를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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