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7편: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

해설:

이 시편도 역시 “주님께서 다스리신다”(1절)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현실 세계의 모습만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계시다면 무능하거나, 전능하다면 무관심하다는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예배의 자리에 모여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선포를 거듭 듣고 또한 고백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고 현실 세계를 보아야만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배제하고 보면 현실은 부조리하고 삶은 향방이 없습니다. 부조리한 현실과 무의미한 삶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자연 현상에 비유합니다. 그분의 통치는 불처럼 강력하며(3절) 번개처럼 무섭습니다(4절). 한 순간에 산을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지진과 같습니다(5절).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공평”(2절)을 드러내십니다. 자연 현상은 때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신비와 위엄과 영광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은 그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만백성은 그의 영광을 본다”(6절)고 고백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렇게도 분명하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공의롭게 통치를 펼치시는데 어리석게도 우상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마침내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7절). 진정으로 우리를 다시리시는 분 그리고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만한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시온과 유다의 딸들은 그분을 향해 기뻐 외칩니다(8절). 

그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닮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10절)고 권면합니다. 정의와 공평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빛은 의인에게 비치며,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샘처럼 솟을 것”(11절)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며 예배할 분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알게 됩니다(12절).

묵상:

우리의 눈은 부분만 볼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은 이기적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현실이 부조리하고 공평하지 않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당장의 현실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더욱 부조리하고 부당하게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선포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가 다스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혹은 알 수 없는 악의적인 신이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우연과 사고가 세상사를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토록 부조리한 현실의 한 가운데서 믿는 이들은 예배 중에 선포합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다른 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그분은 “정의와 공평”(2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선포하는 사람들은 부조리하고 왜곡된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닮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들을 “의인”(11절)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알아주고 높여주기는 커녕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때로는 조롱하고 박해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나 혼자만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누구 좋으라고 내가 이렇게 손해 보고 사는가?’ 같은 의문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결국 의인들을 높여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닮아 살아 지금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마침내 그분 안에서 웃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예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아니고는 부조리한 현실 가운데서 이 영적 진실을 굳게 믿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responses to “시편 97편: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

  1. 교회를 비방하고 떠나는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성의 자랑, 즉 헛된 우상을 쫓고있는 세상입니다. 다곤이 목과 팔이 부러지고 주님의 언약괘 앞에 쓰러저있던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소망을 갖고 살기를 원합니다.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주님의 권능에 온전히 의지하며 안식을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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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을 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빛과 어둠을 주시는 주님의 정의와 공평을 외면하고 내 안에 있는 우상에 이끌려 세상에 묻어가는 내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그늘에서 즐기는 마음의 위안을 물리치고 주님의 밫가운데로 나와서 행하며 주님의 정의와 공평이 무엇인지 깨닫고 늘 감사함으로 즐거움이 샘처럼 솟기를 구합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기뻐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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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여라, 주님은 그의 성도를 지켜 주시며,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10절)” 차별과 불공평과 정의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고 나보다 먼져 앞서가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의 길을 걸어 왔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여 거절할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인도하심을 깨닫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인생길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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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마음에 불편함이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경제적으로 ‘떵떵 거리며’ 사는데 돈을 버는 방법이 영 아닙니다. 불법은 아닌 것 같고, 악한 일이라 할 수도 없는데, 명쾌하게 드러내거나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대를 이어 잘 삽니다. 교회 출석도 봉사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제적인 풍족을 나눌 줄도 압니다. 자기 부모 때에도 경제적으로 윤택했는데 이제는 자식들도 돈을 많이 잘 번다고도 하고, 자기들한테도 아낌 없이 돈을 쓰는 효자들이라는 ‘자랑’이 단골 레파토리입니다. 그들을 보며 드는 불편한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합니다. 그들을 시샘하는걸까요. 남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더더군다나 뭐라고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심사가 불편한걸까요. 그들과 ‘일’로 엮이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경제 방식은 모릅니다. 같이 일을 해 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내가 겪지도 않은 일, 전해 듣기만 한 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정당한 벌이니까 지금까지 잘 해 온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교인이 아니라면 ‘마음 놓고’ 비판하고 욕을 할텐데 교인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도 있고, 더 깊이 따지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시샘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 같아 이리도 마음이 찜찜한 겁니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가 축복의 전부가 아닌 것도 압니다. 하지만 계속 잘 되니까 계속 그렇게 하는건데 그런 풍요 뒤에는 아픔과 손해를 입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싶습니다. 받은 복으로 교회에 헌금을 하고 시간을 내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내 옹졸함과 편협함이 나를 괴롭힙니다. 나한테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는 일이요 세상 경제의 거의 다가 그런 방식과 원리를 따라 움직이는데 해결하지도 못할 일을 놓고 왜 속을 끓이느냐고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시샘이거나 자기의라고, 나의 이기적인 정의감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요즘 읽는 시편의 기자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아파하고 절망한 뒤에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은혜에 자신을 맡기기 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눈물과 회한 속에서 지내야 했을까요. 주님, 저의 마음을 새롭게 지어 주세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제 마음을 닦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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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현실에 갇힌 눈과 세상의 지혜만 쫓는 귀가 아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지혜를 믿고 한걸음 나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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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에대해 이야기하는것을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사랑과 타협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피부가 찢기는 고통의 순간을 버티신것은 아둔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기때문에 세상의 추세를 모르는 고집쟁이 기독교인, 다른 문화를 이해못하는 폐쇄적인 종교인이라고 오해와 비난을 받는것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생각하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너무 하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를 보며 다시 마음을 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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