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장 13-52절: 역경은 장애가 아니다

해설:

바울과 바나바와 요한은 키프로스 섬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배를 타고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지금으로는 터기 반도 중부의 해안 도시)에 이릅니다(13절). 그 때 마가 요한은 중도에 포기하고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누가는 침묵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릅니다. 타우르스 산맥은 도보로 넘기에는 매우 험했고 강도떼도 자주 출몰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안전하게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안식일을 맞았을 때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 예배에 참여합니다(14절). 그곳 유대인들은 관례대로 율법서와 예언서를 낭독한 후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를 해 달라고 청합니다(15절). 그러자 바울이 일어나 설교를 시작합니다(16절).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후(17-22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에 대해 설명한 다음(23-29절),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여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30-37절). 설교의 결론부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일은 성경의 예언을 따라 일어난 것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38-41절). 

회당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아 다음 안식일에도 설교해 달라고 청합니다(42절). 그들 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복음을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43절), 다음 안식일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44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심을 느끼고 바울과 바나바를 반박하고 비방합니다(45절).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니 이제 이방인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답하고(46-47절) 돌아섭니다.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에 호응하여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그 성의 지도층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냅니다(48-50절).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말씀(마 10:14)을 따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51절).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52절). 

묵상:

믿는 것은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 안에서 변화되고 성장하면 여러 가지 죄악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상실과 아픔을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 상태에 머물러 황홀경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영적으로 변화되고 성장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 드립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이라는 안전지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선 것처럼, 믿는 이들은 누구나 변화와 성장의 과정에서 그런 부름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부름을 따르는 과정에는 고통과 손해와 상실과 박해가 있습니다. 요한 마가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안전지대 안으로 퇴각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아갑니다. 고통과 손해와 상실과 박해는 그들의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그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럴수록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더욱 충만하게 역사했고 그로 인해 고난 중에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역설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더 커지고 무거워지지만 그로 인한 기쁨은 더 커집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그 역설의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 responses to “사도행전 13장 13-52절: 역경은 장애가 아니다”

  1. 그렇습니다, 선교가는것을 즐거운 여행가는것으로 잘못아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는것 이기에 궁핍과 방해와 오해가 따라오는것이 당연한것이고 그
    어려움을 감수 함으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강을 맛볼수있는 OXYMORON
    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마지막 숨쉴때까지 주님따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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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상사에 찌들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 인지를 알지못하여 방황하여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인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이 예수안에서 의롭게 살게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과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나 그 전도의 길은 평탄한 길만이 펼처져 있지않고 어렵고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주님! 나머지 인생이 그 고난의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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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바울의 설교를 읽으면서 그의 청중 가운데 있는 것처럼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특별한’ 사람이니 설교 또한 특별하고 신비한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나 기대하는 정도가 컸을 지 모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조상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가르쳤지만 이스라엘은 그를 죄인 취급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중단하지 않고 예수님을
    살리셨으며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조상에게 약속하신 복된 소식 (32절)을 지금 이방인 앞에서
    전합니다. ‘썩지 않는’ 생명의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 또한 썩지 않을 세계에 속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의의 세계에 들어 가게 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이방 사람들이 느꼈을 자유와 희망을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사유하고 성찰할
    때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상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너머의 것들, 추상적이지만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힘이나 계획 같은 것을 사색하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도 생명이 끊어지는 물리적인 죽음 뒤에 있을 것 같은 영원에 대한 호기심 두려움, 기대 같은
    것으로 이어집니다. 인간 사회에 종교가 있고 예술과 철학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바울의 말씀 속에서 어떤 힘을 느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48절)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지금까지 산 것과 다른 인생을
    시작합니다. ‘특별한’ 설교가 된 셈입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어떤 것을 깨우는 말씀은 언제나 특별한 메시지가 됩니다.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고 들은 이방인들이 모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듣기만 했을 뿐 믿음의 결단을 하지
    않은 청중도 많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로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예정된 선택인가? 하는 물음이 생기게
    만듭니다. 오늘 묵상의 몫을 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전승에 합류하게 하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선택하여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아직 그 기쁨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한 나도 주님은 쓰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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