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장 12-29절: 내가 만난 하나님

해설:

바울의 간증이 계속됩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다마스쿠스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아나니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받던 사람으로서 예수를 믿던 사람입니다(12절). 그가 찾아와 기도해 줌으로써 바울은 시력을 회복합니다(13절). 아나니아는 바울에 대해 자신이 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세례를 베풉니다(14-16절). 

그런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으나 환상 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그 성을 떠나라고 하십니다(17-18절). 그는 주님께, 그들이 자신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면 귀담아 들을 것이라고 답합니다(19-20절). 하지만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21절). 바울이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끊고 소동을 벌입니다(22-23절). 그들은 바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과거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는 원인을 알기 위해 천부장은 바울에게 고문을 가하여 취조하도록 명령합니다(24절). 

병사들이 고문을 시작하려 하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정당한 절차와 사유 없이 취조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항의합니다(25-26절). 천부장은 바울이 태어나면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며 그를 구금해 둡니다(27-29절).

묵상:

직접 경험한 일만큼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교회의 박해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로 변한 것은 연구의 결과도 아니고 토론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체험의 결과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체험이 없었다면 그는 율법학자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의 영적 체험을 통해 그는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흔들림 없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확신이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직접 경험한 일을 증언하는 것만큼 강한 전도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해하려고 분노한 무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일을 증언합니다. 그 증언 앞에서 무리는 합리적으로 반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증언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 기 자신의 믿음을 부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폭력으로 바울을 침묵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예수님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쯤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쯤 가지고 있다면 누구 앞에서든 자신있게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2 responses to “사도행전 22장 12-29절: 내가 만난 하나님”

  1. 지금까지 살아온것이 온전히 주님의 은혜인것을 고백합니다. 미천한 존재에게도
    짧고 미약하지만 천국의 맛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러나 자주 그토록 귀한 체험을 자주 잊고 사는 가련한 신세입니다. 매일 아침
    사귐의 소리를 통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는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또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주님의 인도
    안에서 오직 십자가만이 천국의 문인것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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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바울 사도의 하나님 경험은 강력합니다. 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환상이나 이적을 그는 몇 번씩 경험합니다. 논리와
    수사에 있어서도 빼어난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이성과 논리의 옷을 입히고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 공간으로 나가게 만듭니다. 신앙
    간증이라는 시냇물이 교리와 학문의 강물로 커집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는 ‘도사’이고 현자입니다. 명강사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처럼 강력한 체험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그렇게 신비한 경험을 할 지 모릅니다. 어찌보면 경험 자체의 값 보다 경험의
    의미가 더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는 철학자의 선언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짜
    일어난 일이냐 페이크 뉴스냐를 가려 내는데 신경을 쓰다 ‘진실’의 메시지는 놓치고 말기도 합니다. 목회 안수위원회가 모여 캔디데이트
    인터뷰를 하면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단한 배경을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신의 “Call Story”를 말해 보라는 질문입니다.
    스토리가 대단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목회자의 소명 이야기와 목회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확신을 갖고 안수를 받은 목회자라고
    해서 확신에 찬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가 어렵다고 말하는 거겠지요. “하나님이 원하신다!”라고 확신하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꼭 그렇게 되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빛이 나를 둘러쌌는데, 분명 내 이름을 부르셨는데… 어려운 것은
    목회 뿐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모호한 상태, 답이 없거나 너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굳이 반기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는 모습은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이렇게 되어가는 자신을
    봅니다. 머리 속에는 바울인데 거울 속에는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힘들 때에는 소망의 성령을 만나게 하시고, 좋을 때에는 책임의 성령을 느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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